태백 한달살이 : 에필로그
텃밭에 있는 고추 색이 변하고 있어. 초록색 위에 빨간색이 타고 올라오면서 그러데이션을 만들고 있네. 숙소 바로 앞에 있는 텃밭이고 선명한 색이라 못 보고 지나치기 어려울 정도인데 나는 지난 며칠 동안 그 어려운 일을 해냈었나 봐. 어떻게 오늘에야 발견했는지 여러 번 생각해도 알 수가 없네. 하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일주일이 가고 또 그렇게 한 달이 갔는데 뭘. 그러고 보니 붉은색이 이틀 남은 내 태백 한달살이 데드라인 같다. 아쉬워 발길이 안 떨어질까 봐 쇄기를 박아놓는 거겠지. 색이 다 올라오면 질척대지 말고 바로 가라고 말이야. 그래, 열심히 붉어져라. 붉은색은 네게 제법 잘 어울리니. 마지막은 너도 나도 제일 멋진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끝을 생각하니 생뚱맞게 처음이 떠올라. 한 달 전 텃밭은 잎, 열매, 줄기 할 것 없이 모두 같은 색으로 푸릇푸릇했었지. 음지에 있는 텃밭이라 작물이 익는 시기가 다른 밭보다 좀 늦었어. 동네 다른 집들은 벌써 붉은 고추를 수확해 볕에 말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장에는 다 말린 걸 파는 상인들도 제법 있었고. 작은 텃밭이라 이곳 주인은 수확에 대한 큰 기대는 없는 듯했어. 너도 세상 구경할 시간을 더 벌 수 있었으니 그의 무관심에 큰 불만은 없었을 거라 봐. 텃밭은 내가 태백에 적응해서 편안해지는 속도에 맞춰 익어갔어. 덕분에 나도 하루가 가진 힘이 얼마나 큰지 눈으로 보며 익어갈 수 있었지. 가끔씩 습관적으로 세월에 무심해져서 문제긴 했지만 말이야. 매일 제자리에 있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자연스럽게 변하며 사는 게 뭔지 가르쳐줘서 감사해.
텃밭처럼 태백도 소리 없이 변했어. 무딘 나로서는 황당한 일이었지. 분명 매일이 똑같은 것 같았거든. 나는 아침마다 똑같은 시간에 서점으로 갔었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배가 고파질 때까지 글을 쓰고 책을 읽었었어. 어제도 오늘도 다른 게 없는 아침이었는데 문득 서점 앞에 있는 산이 변한 게 보이더라고. 처음에는 공기를 꽉 채운 채 들리던 매미 소리도 사라지고 말이야. 대신 지금은 멀리서 새소리가 들리네. 아마도 매미 소리에 묻혀 있다가 이제야 들리는 게 아닐까 싶어. 주변이 모두 시간을 두고 천천히 변하고 있었어. 언제 이렇게 변한 거지? 나는 얼마나 둔하게 살고 있는 걸까. 너무 자연스러워 나를 놀라게 하는 자연의 변화 앞에서 나는 입 벌리고 놀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러던 찰나에 너의 그러데이션을 본 거야. 자연의 변화가 네 몸에 그대로 있더라고. 업무 비밀일 텐데 내가 더는 당황스럽지 않도록 내 속도에 맞춰 변화를 보여주는 듯했어. 고마웠지.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시간 동안에도 자연은 이렇게 변하고 있었구나. 텃밭 앞에 쭈그리고 앉아 너를 한참 동안 보고 있었지만 그러데이션은 그대로였어. 그렇게 당하고도 내 눈에는 여전히 변하지 않을 색처럼 보였지. 그때 깨달았어. 갈고닦지 않은 흐릿한 눈으로는 늘 자연 앞에서 놀라며 살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야.
자연은 시시각각으로 변하지만 도시 건물은 1년 내내 똑같아. 그러니 도시 출신인 나는 변화에 흐릿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굳이 무딘 내 시력을 변명해 보자면 그렇다고. 내가 태백을 좋아했던 이유도 머리로만 알았던 자연스러운 변화를 매일 보며 살 수 있어서였어. 자연을 느낄 수만 있다면 하루를 좀 더 꾹꾹 눌러 담아 삼킬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예전에 무심했던 날들이 아쉬워서라도 다시 도시로 돌아가면 집에 화분 몇 개는 들여놓고 살아야겠어. 태백에 있었던 시간만큼 자연스럽진 않겠지만 매일 변하는 화분을 보며 하루에 한 번은 나도 변신하며 갈고닦고 싶으니까.
텃밭 앞에서 작물 구경하다가 하루가 다 갈 것 같아. 귀한 네 모습을 이젠 못 본다 생각하니 쉽게 몸을 움직일 수가 없네. 초록과 빨강 사이의 그러데이션처럼 네 앞에 있는 나도 한 달 전보다는 자연스럽게 보였으면 좋겠어. 그래서 마지막 날은 더 편하게 헤어지고 싶어. 자연에서는 원래의 색도 변하는 색도 각자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나의 오늘도 그렇겠지. 하루씩 꾹꾹 담았던 태백에서의 40일이 잘 익어서 선명한 빨간색 안에 잘 스며들 수 있길 바라. 그래야 품질 좋은 고춧가루로 깊은 맛을 내는데 한몫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마지막 인사를 이틀 전에 미리 하는 건 좀 부자연스럽지? 열심히 헤어질 인사한 후에 또 만나면 괜히 어색할 수도 있고. 그래도 이번만 봐줘. 오늘 드디어 몇 달간 가물었던 강원도에 기다렸던 비가 내리고 있거든. 폭염일 때 만나서 빗소리 들으며 헤어지는 게 더 행복한 끝 같잖아. 나머지 시간 동안 나도 빗소리 들으며 시원해질 테니 너도 오랜만에 실컷 마시며 더 열정적으로 붉어지렴. 너의 마지막 모습을 기대해. 나도 너처럼 마지막이 제일 멋질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지내는 동안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 인연이 되면 또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