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한달살이 : 철암탄광역사촌
'까치발 건물'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어. 본래는 각자 다른 색인 듯했지만 첫 느낌은 다 뿌연 회색빛이었지.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까치발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어. 건물 몸체를 받치기엔 턱없이 얇아 보기가 딱하더라. 몇십 년 전에는 실제로 꽤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던데 진짜일까? 눈으로 보고도 잘 믿기 어려웠어. 탄광촌에서 산 경험치가 없어서 더 그랬을 거야. 나는 건물을 마주 본 채로 똑같이 까치발을 해봤어. 지면에 닿는 면적이 적어지면서 내 몸이 균형을 잡기 위해 열심히 뒤뚱거렸지. 앞에 있는 건물들이 나를 보며 까치발로 서 있는 건 힘들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
강원도 철암에 있는 철암천을 따라 세워진 건물들이었어. 근처 탄광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라더라고. 예전에는 물에 늘 석탄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물 색깔은 원래 검은색인 줄 알았대. 다행히 물은 몇십 년 동안 천천히 제 색을 찾아가고 있는 듯했어. 1960년대 번성했던 석탄 산업이 시대 흐름을 따라 쇠퇴한 덕분이었지. 나는 제법 맑아진 물을 보며 안심했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그때의 아이들은 나이 지긋한 얼굴로 검은 물을 그리워하며 이곳을 찾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
건물 앞에는 안내 표지판을 고치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어. 의외란 생각이 들었지. 마을 전체가 허름한 느낌이라 처음엔 방치한 느낌이 들었거든.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제법 진심이 느껴지더라고. 일하면서 말하는 대화도 그렇고 말이야. 나도 그들의 표정을 따라 저절로 진지하게 마을을 둘러봤던 것 같아. 그리고 석탄 가루로 인해 생긴 회색 분위기 자체가 곧 이 마을이라는 걸 깨달았지. 이곳을 깨끗하게 닦아 선명하게 만든다면 보존의 의미가 없지 않을까. 회색은 방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애쓴 흔적이라는 걸 걷다 보니 알 것 같았어.
탄광촌 전체를 역사박물관으로 만들어 보존하는 것 자체가 인상적이었어. 보통은 지나간 것들은 다 지우고 새로 건물을 세워버리잖아. 옛 모습은 사진이나 물건 몇 점 따위를 전시하는 것으로 갈음하고 말이야. 그런데 마을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게 해 주니 60년대 탄광촌 사람들의 삶이 더 생생하게 와닿더라고. 석탄 가루로 뒤덮인 까치발 건물은 그때와 쓰임은 달랐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어. 간판은 옛 것 그대로 두고 안은 전시관으로 바뀐 곳이 많았지. 1층 한쪽에는 카페가 장사를 하고 있기도 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느낌이었어.
탄광촌은 나는 잘 모르던 현실이었어. 연탄은 그저 식당에서 고기 구워 먹을 때 가끔씩 볼 뿐이었으니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진폐증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린다는 현수막을 봤어. 그 옆에는 진폐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한 법률적 상담이 가능하다는 변호사 사무실 광고도 있었지. 이전까지는 보고도 그냥 지나쳤던 글귀였는데 오늘은 한눈에 들어오는 거 있지. 태백은 탄광을 중심으로 생업을 이어가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거잖아. 탄광촌을 떠났어도 태백 사람들은 여전히 까치발을 한 채로 살고 있다는 걸 알겠더라. 회색 이불로 덮힌 듯한 건물이 다시 떠올랐어. 석탄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살기 위해 석탄을 캐야 했고 그래서 아플 수밖에 없었던 그 삶의 애환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었어. 그저 회색 건물을 허물지 않고 보존하려고 결정한 태백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질 뿐이었지.
세상을 돌아다니며 느끼는 건 내가 아는 세상은 너무나도 적다는 거야.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을 모두 쓴다 해도 다 알 수도 없을 거잖아. 그래서 배우면 배울수록 막막함이 올라오는 건가 봐. 아무튼 탄광촌을 여태 모르고 지냈다는 게 부끄럽네. 회색의 의미를 다시 떠올려 봐. 늦었지만 오늘 배운 건 잊지 않겠다고 다짐도 하고 말이야. 내 작은 배움이 탄광촌에서 힘들게 살다 돌아가신 분들과 지금도 고통 받고 계신 분들께 조금의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과거는 계속 살아 있을 거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