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한 달 : 오해 & 이해
공항 검색대 불빛이 바뀌었어. 담당하시는 분이 내 짐이냐고 물었지. 살짝 긴장한 나는 그렇다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어. 소리 없는 내 반응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거란 생각은 못 하고 비행기를 못 타는 건 아닌지 걱정만 하면서 말이야. 그분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바로 태도를 바꾸셨어. 그리고 짧은 한국어 단어와 함께 큰 몸짓으로 나를 한쪽 구석으로 데려가셨지. 나는 그곳에서 가방을 가리키며 열어달라는 세심한 그의 제스처를 봤어. 뜻하지 않은 상대의 친절은 여행 첫날의 긴장감을 순식간에 날려버리기 충분했어.
“저 한국인이에요.”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어. 좀 전까지 내 얼굴에 달라붙어 있던 당황스러움이 담당자의 얼굴로 이동하는 게 느껴지더라. 그는 멋쩍은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날 따라 웃으셨어. 그리고 다시 태도를 바꾸어 몸짓 대신 말로 나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셨지. 국제선을 이용할 땐 100ml 이상 되는 화장품은 기내 반입이 안 되는데 몰랐냐고 물으시더라고. 안내문을 허투루 읽었다는 자백을 바로 해야 했어. 그와 나 사이에 더 이상의 오해는 없었음 했거든. 그는 번거롭겠지만 다시 밖으로 나가 수화물로 짐을 맡기면 괜찮을 거라고 하셨어. 가진 게 시간밖에 없는지라 나도 두 말 않고 그러겠다고 했어.
대만 가오슝으로 가는 길이었어. 짐이 많지 않아 기내에 들고 타면 가오슝 공항에 내려서도 수화물 찾는 수고로움 없이 바로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지. 빠르게 숙소에 도착하고자 하는 계획에서 '빠르게'만 버리면 걸리적거릴 게 없는 상황이었어. 한 달간 쓸 수 있는 보디로션과 보디샴푸를 검색대에 버리고 현지에서 또 살 만큼 사치 부릴 여유도 없었고 말이야. 나는 다시 출국장 밖으로 나왔어. 그리고 단계별 안내를 받으며 만나는 담당자들에게 꼬박꼬박 소리를 내어 한국어로 인사를 했지. 대화는 오해가 낄 여유 따윈 없이 깔끔했어.
나와 함께 타는 사람들 대부분이 대만 사람인 듯했어. 비행기 안으로 들어갈 절차를 밟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사방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이 난무하더라고. 나에겐 앞으로 한 달간 계속 들으며 살아야 할 낯선 음악 같았어. 익숙해지기 위해 애써 최면을 걸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나를 보며 중국어로 뭐라고 하시는 거야. 듣는 척도 겨우 하고 있는데 말하는 척이 언감생심 가능하겠어?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는 눈빛을 발사했지. 다행히 그는 곧장 중국어를 접고 짧은 영어로 사정이 있으니 자신들 앞으로 가라고 다시 말해주더라고. 나는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검색대 앞에서와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어. 앞으로 가오슝에서 있을 시간의 예고편이겠구나 싶었어.
일본에서 지낼 때는 일본인 같다는 말을 듣곤 했었어. 그런데 대만으로 가려니 또 대만인처럼 보이나 봐. 한중일 세 나라 사람들은 생김에 미묘한 차이가 분명히 있는데 내 얼굴에는 애매하게 세 나라가 모두 섞여 있나 보다 했어. 나는 오해가 기분 나쁘지 않았어. 되려 안심이 되는 부분도 있었지. 내게 대만은 어릴 적 했던 브루마블 게임에서나 보던 나라였거든. 살면서 접점이 전혀 없었던 곳이라 막상 가려니 두려움이 쉽게 떨쳐지지가 않더라고. 계획할 때는 가 보지 않은 곳이라 선택했으면서 말이야. 사람들이 너와 나는 별반 다르지 않으니 미리 겁먹지 말라고 말해주는 듯했어.
가오슝 공항에 도착해서도 나는 여전히 애매한 표정이었어. 생각보다 더 더웠거든. 한국은 폭염을 겨우 벗어나 한숨 돌릴 때였는데 뭣도 모르고 제 발로 다시 폭염 속으로 들어온 거더라고. 내가 왜 여기로 온다고 했을까. 한 달간 수건은 두 개 제공되니 빨아 쓰라고 말하는 숙소 주인의 문자를 보고 나서는 오는 내내 겨우 참았던 더위에 대한 불만까지 더해져 후회가 폭발했지. 그러다 문득 종일 굶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배고파 징징거리는 건가. 모든 게 낯설어서 불안한 건가. 정답은 몰라도 일단 배부터 채우고 보자 싶었어.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식당에 바로 들어갔지. 무슨 맛인지 기억도 안 나는 대만에서의 첫 끼를 야무지게 씹었어. 서러운 와중에도 잘 먹는 나를 보니 며칠 지나면 곧 적응은 하겠다 싶더라
내 안에는 질긴 생명력이 있어. 주로 여행 첫날에 잘 드러나지. 낯선 곳에서 안정감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는 나를 느껴. 당장은 불편하지만 편해지면 다시 떠나는 청개구리 같은 나는 그 순간을 싫어하진 않는 듯해. 그래도 잘 지낼 거란 말은 못 하겠네. 그냥 살다가 돌아올게. 가오슝은 너무 덥거든. 안 더우려고 파닥거릴수록 더 더워질 거잖아. 그러니 최대한 에너지 아끼며 살려고. 가오슝 첫인상이 별로라서 정 붙이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냥 그러려니 할래. 무지한 내 첫눈에 대만의 본모습이 다 들어올 리 만무할 테니까. 오해 가득한 지금 마음도 시간이 지나며 이해로 바뀌는 순간들이 올 거라 믿어. 오늘까지만 툴툴거릴게. 내일부터는 푹 익은 대만에서 시원한 곳 좀 찾아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