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와의 눈싸움

첫 문장의 무게

by 마나

백지랑 눈싸움만 한 시간째다. 첫 문장을 편히 쓸 수가 없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백지 앞에서 백치가 된 듯하다. 누군가가 딱 정해주면 좋겠다. 그런 누군가가 있을 리가 없지.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앞서는 날에는 꼭 이렇게 혼자서 씨름을 한다.


어딘 작가가 쓴 <<활활발발>>이란 책을 읽고 있다. 글쓰기 모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적은 글이다. 오늘 내가 읽은 부분에서는 첫 문장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글을 쓸 때 첫 문장에 대한 부담이 있구나. 내용을 떠나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웠다. 나도 모임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같이 고민하며 글을 쓰는 책 속의 사람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부러워만 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잖은가. 쓸쓸함을 뒤로하고 나도 살포시 그들 사이에 끼어 보기로 했다. 혼자서 고민을 시작했다. 첫 문장이 인상적이었던 책이 뭐가 있을까.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이 떠올랐다. 벌교를 중심으로 1950년대에 있었던 빨치산과 국방군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이다.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대한민국 사람이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책. 이 책의 첫 장면은 정화섭이 어두운 밤 진트재를 오르는 장면이었다.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동녘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밤마다 스스로의 몸을 조금씩 조금씩 깎아내고 있는 그믐 달빛은 스산하게 흐렸다. 달빛은 어둠을 제대로 사르지 못했고, 어둠을 달빛을 마음대로 물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달빛과 어둠은 서로를 반반씩 섞어 묽은 안개가 자욱이 퍼진 것 같은 미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작가는 소설 전반에 깔린 조상들의 삶을 어두운 새벽의 진트재 모습으로 대신 보여주었다. 벌교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 벌교 여행을 갔을 때 정화섭처럼 진트재를 올라갔다.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벌교 전체를 보고 있자니 <<태백산맥>> 속에 나오는 빨치산과 국방군 간의 수많은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조정래 작가는 진트재를 첫 시작으로 정화섭의 발걸음을 따라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전개시켰다. 카메라 렌즈가 진트재에서 서서히 벌교 곳곳으로 들어왔다. 소설의 처음 몇 문장이 뒤에 나오는 그 많은 이야기를 다 아우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진트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소설의 첫 부분을 쓰며 작가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갑자기 첫 문장에 대한 내 고민이 너무 작아 보인다. 당장 눈앞에 놓인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을 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생각해보면 쉬운 길을 찾을 수도 있겠다 싶다. 부끄럽지만 작아 보이는 내 문제를 다시 꺼내 본다. 조금씩 생각나는 것들을 두서없이 끄적여 본다. 아무것도 적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내 손이 움직이는 것이 고맙다.


'백지', '눈싸움'과 같은 단어들이 눈에 띈다. 이것을 더해 '백지와의 눈싸움'이라는 제목을 만들었다. 제법 마음에 든다. 제목이 만들어지니 첫 문장은 조금 쉽게 써진다. 물꼬가 좀 트이는구나. 안심이 된다. 이제부터는 엉덩이 싸움이다. 뭐든 열심히 적다 보면 글은 끝이 나 있을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몸으로 실감 중이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이 백지와 싸움을 하게 될까. 질문을 하고 당연히 매일 할 것이라는 답을 낸다. 그런데 나와는 달리 백지는 아무런 욕심 없이 나를 바라보는 듯하다. 그래,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백지 앞에서 홀로 싸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정래 작가는 백지를 보며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답답함은 내가 글을 쓰려고 애쓰는 증거라고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소리 없는 메아리만 기다리며 혼자 생각하고 혼자 글을 쓴 하루였다. 글 쓰는 것은 원래 그런 작업이지만 오늘은 조금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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