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텐 알베크의 <<삶으로서의 일>>을 읽고
예전 학교에서 근무할 때였다. 월요일 오전 시작은 교무회의였다. 교사들은 회의에 전원 참석해야 했고 대부분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늘 맨 뒤에 앉아 졸았고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흘렸다. 월요일 오전, 주말이 끝난 후 학생들의 기분이나 상태를 체크할 시간은 없었다. 대신 회의 참석여부를 확인하는 종이에 내 이름을 적기 위해 5년간 쓸데없는 회의를 개근했다.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그 회의를 취소하거나 회의실을 떠날 만큼의 자기 존중을 가진 사람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될까.
책에서 던진 질문을 읽으며 나는 예전 회의 시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개근한 사실이 부끄러웠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하는 잉여 짓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얼마나 더 있으며 얼마나 시간이 걸려야 알 수 있게 될까. 지금 느끼는 부끄러움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나는 나를 존중하며 살고 있는가.
자기 존중에 기초해서 중도 하차를 선택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평가질하기보다는 그 사람에게 호기심을 가진다면 그가 정말로 누구인지 알아낼 기회가 생길 것이다.
실제로 회의 시간이 쓸모없다며 참석하지 않는 동료 교사를 본 적은 없다. 설사 그때 그런 분이 계셨다 하더라도 나는 속으로라도 응원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왜 소란스러운지를 무심히 쳐다보다 다시 조는 것이 다였을 것이다. 그 당시 학교는 내게 밀린 숙제처럼 묵직했다. 그 무게를 그대로 가지고 5년을 근무했다. 아침 7시 30분에 출근해서 밤 9시 30분 야자감독을 끝내고 퇴근했다. 집에서는 다음 날 학교를 가기 위해 무거운 몸을 침대에 던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나를 존중하기는커녕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일하던 때였다. 그 학교를 나와야 한다는 생각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삶으로서의 일>>이란 책은 '일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 이유'를 찾는 것에서 시작했다. 나는 예전 학교에 근무하면서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갔다. 특히 개인적인 시간을 거의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이 생각 속에는 일하는 시간과 개인적인 시간을 균형 있게 분배해야 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었다. 즉 기본적으로 시간을 두 개로 나눈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요즘 흔히 말하는 워라벨 개념이다. 작가는 이 개념이 틀렸다고 말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One Life'이다. One이라는 단어 하나가 책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한 사람은 하나의 삶과 하나의 시간만을 가질 뿐이라는 뜻이다. 사회적 역할로, 가지고 있는 조건으로 사람을 나누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불행은 시작된다. 교사로서의 나와 개인으로서의 나가 다른 것이 아닌데 그것을 나누면 일이 많은 날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삶이 줄어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관점을 바꾸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관점을 어떻게 바꿔볼까. 삶을 쪼갤 수 없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학교에서의 삶도 나의 삶이란 뜻이다.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교사로서의 삶도 내가 가진 하나의 삶 속에 있을 뿐이다. 학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나는 퇴근 후 삶을 분리하여 보았다. 학교는 견뎌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퇴근 시간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퇴근 후의 삶도 딱히 의미가 있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의 관점을 바꿔 보았다. 혹시 내가 그때 학교 안에서 연애를 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꼭 연애가 아니더라도 학교 안에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면 빠른 출근과 늦은 퇴근이 크게 문제가 되었을까. 신기하게도 질문에 대한 답이 다르게 나왔다. 출퇴근 시간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을 거라는 결론을 냈다. 관점의 문제가 맞았다.
작가는 책에서 '삶으로서의 일'을 찾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그중 두 개가 인상적이었다. 첫째, 회사의 목적이 개인의 목적과 닮은 점이 있는가. 둘째, 회사 내에서의 삶이 개인을 발전시키는 기회를 제공하는가. 질문을 내 삶에 넣어 바꿔보았다. 학생들이 바뀌어가는 모습이 내가 바뀌고 있는 것과 닮았는가. 나는 배우면서 근무하고 있는가.
현재 학교도 업무가 만만치 않다. 학생 수가 적기는 하나 교육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교사 4명이 책임져야 하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레시피 없이 요리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근무를 해야 한다. 여기서는 회의 시간에 졸 수 있는 자리는 없다. 동그랗게 둘러앉아 회의를 시작한다. 명확한 길을 제시해주는 곳이 없어 가끔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학교를 사랑한다. 길 없는 길을 가는 것이 내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른 것을 인정해주는 회의 분위기 덕분에 좀 더 적극적인 의사표현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무의미한 것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어 이번 학교는 나에게 의미가 있다. 현재 나는 삶으로서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은 '그냥 일'이 아니라 바로 삶이다.
책에서는 삶을 쪼갤 수 있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한다. 어디에 있든 자신이 있는 곳에서 나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스스로를 일관되게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예전 학교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회의 출석 장부에 이름을 적지 않고 교실에서 학생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수 있을까. 설사 회의에 참석했다 하더라도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판단될 때 먼저 가겠다고 일어설 수 있을까. 아마 심하게 고민할 것이다. 배척당하는 것이 무섭기 때문이다. 그래도 참석하지 않는다로 결론을 내볼 것이다. 운이 좋아 왜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지 궁금해한다면 그때는 정중하게 답을 해보고 싶다. 회의에 들어갔다가 무의미하다고 나올 배짱은 없다. 그래도 누군가가 그리 행동한다면 나는 기꺼이 동조자가 되어줄 수는 있다. 지금은 여기까지 성장한 나를 본다. 내가 나를 존중하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