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처음 필사를 시작한 것이 2022년 5월 26일이다. 지금은 193쪽까지 진도가 나갔다. 거의 4달 정도가 걸렸다. 첫 번째 공책을 다 쓰고 두 번째 공책으로 넘어간 상태이다. 4달 동안 내 삶에서 필사보다 느릿한 것은 없었다. 왼손 덕분이었다. 유일하게 한숨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반쪽을 쓰면서 1시간이 넘게 걸렸다. 할 때는 몰랐는데 끝난 후에 손가락에 쥐가 났다. 평생 한 번도 필기를 해 본 적이 없는 왼손이 조금 놀랐던 모양이다. 삐뚤빼뚤한 글씨체가 조카의 것과 닮아 짓궂은 웃음이 났다. 조카도 이렇게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구나.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린 시간이 뜻하지 않게 왼손을 통해 드러났다. 내 안에 어린 시절이 다시 보였다. 어린 아기가 크지도 않은 채 왼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문득 아이를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첫 번째 공책 마지막은 9월 13일이었다. 자세히 보면 아직 멀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제법 글씨가 안정감이 있다. 자유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나는 지금 자유로운가. 남들이 보면 쓸모라고는 없는 짓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조금은 있고, 또 이것을 뿌듯해하는 내가 있으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혼자 중얼거리며 필사한 것을 다시 보았다. 아직 서툴러 자유롭지 못한 왼손 필체의 답답함이 보였다. 나는 또 짓궂은 웃음이 나왔다. 느리고 따분하게만 보이는 이것이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혼자 웃고 있는 걸까. 굳이 파고들자면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냥 두었다. 왜 내가 필사를 계속하고 있는지는 필사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다. 조급할 것도 연구해야 할 것도 없어서 필사가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2022년 9월 19일이다. 왼손은 필사에 제법 적응이 되었다. 할 것 많은 세상에 굳이 이것까지 해야 할까 싶지만 그만둘 생각이 없어 계속한다. 내 속에 아기 같은 부분을 찾아내어 내 나이만큼 성숙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모두 다 찾을 수는 없겠지만 하나씩 찾아내는 재미를 찾은 듯하다. 왼손 필체가 오른손 필체와 다르다. 좀 더 딱딱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마음에 든다. 아직 나에게도 때묻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뜻은 아닐까. 오른손이 왼손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왼손이 튼튼해질 때까지 오른손은 기다려준다. 글씨를 쓸 기회를 기꺼이 왼손에 내어준다. 오른손의 소리 없는 응원에 왼손은 하루만큼 성숙해진다. 그 속의 여유가 참 좋다.
얼마 전, 필체로 사람의 성격을 알아보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내가 가진 두 필체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오른손 왼손을 각기 다른 두 사람으로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다. 내 안에 얼마나 많은 필체가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을까. 혹시 발가락도 쓰기가 가능할까. 복잡한 미로 같은 삶에서 길을 찾고 싶어 오늘도 나는 필사를 한다. 재미가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