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동생 고정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T력이 두 번째로 높은 사람이다.
차갑고, 계산적이고, 결과를 중시하며, 지지부진한 감정 이야기에는 도통 공감도 이해도 못하는 인간. 나의 어지러운 감정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음... 알 것 같아"라는 말만 돌아온다. 알 것 같다는 말은 모르고 싶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이 주제에 대한 대화를 이만 여기서 마치자는 뜻으로 하는 말이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T력이 두 번째로 높은 사람이 정우라면, 첫 번째는 아빠다. 아빠의 MBTI는 TTTT. 아빠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기쁨과 분노 단 둘 뿐인 것 같다. 그래서 아빠와 나는 가끔 대화가 원활하게 이어지지 못한다.
내가 그리움, 미련, 외로움, 불안함, 시원섭섭함, 망설임에 대해서 말하면 아빠는 잠시 정적을 이어가다가 "앞으로 나아가라!"라는 말만 한다. 이게 뭔 뚱딴지같은 말이야? 아니, 저기 아저씨 내가 지금 그립다니까요. 내가 외롭다고요. 불안하다고요! 시원섭섭하고, 망설여진다고요! 그러면 아빠는 나와 똑같이 '이게 뭔 뚱딴지같은 말이야?'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거 다 이미 지나간 거, 버려야 할 거 쥐고 있어서 그래. 왜 그러니? 앞만 봐. 미래는 무궁무진해!"라고 하는 것이다.
내 눈에 아빠는 맨날 미래에만 있는 사람, 아빠 눈에 나는 맨날 과거에만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시차가 너무 달라서 서로를 만나야 할 때 굉장히 피곤해한다. F로 태어난 내가 두 T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그 축축한 역사에 대해 쓰려면 팔만대장경도 모자라다.
그러던 어제 정우한테 전화가 왔다. 정우가 말했다. 요새 아빠한테 서운하고 섭섭하다고.
- 왜?
아빠랑 만나면 이제는 본론 이야기만 딱하고 끝내고 헤어진단다. 어느 순간부터 아빠를 만나면 조금 어색하고 낯설다는 것. 정우는 덧붙였다. '내가 낯설다고 느낀다고 그런 티를 내버리면 안 돼. 그럼 진짜로 낯설어지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옛날처럼 대하는데 사실 이런 노력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거 아니냐면서.
정우는 우리는 가족인데, 가족인데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지 너무 혼란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정말 T 같은 응수다. 내가 아빠랑 정우 사이에서 뭔갈 배우긴 한 것 같아. 하하하.
정우는 옛날의 아빠를 원한다고 했다. 아들아~ 하면서 집에 들어오고, 배대기(*웃통 벗고 배와 배를 맞대고 까르르 거리는 행위)를 하고, 사담을 나누는 것.
정우야 너도 F 다 됐구나. 놀랍다. 옛날의 너였으면 이 미묘한 관계 틀어짐에 대해 인식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인식했다 할지라도 고 씨 집안, 같은 호적 등의 객관적 지표를 들며 우리가 전과 다름없는 가족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옛날의 너는 아빠한테 서운해하지 않았을 거야. 너무 잘 맞는다고 생각했겠지.
안쓰러운 정우. 누나는 F지만 계속 T처럼 말하게 되네. 미안 뱉을게. 정우야 우리 이제 그거 못 해. 우리 가족은 이제 예전의 관계가 아니다. 받아들여.
우리 세 가족이 푸르지오 아파트에서 나와 각자의 보금자리를 찾아 찢어졌을 때, 그때부터 우리는 달라진 거야. 내가 그랬잖아. 그냥 같이 살자고. 계속 세 명이서 같이 살면 안 되냐고. 같이 못 살면 이 집이라도 그대로 두면 안 되냐고 내가 말했잖니. 네가 싫다며. 독립하고 싶다며. 너는 그때 누나의 말이 감상에 취한 F의 넋두리정도로 여겼나 본데 그게 아니었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사람은 피가 섞여서 가족이 되고, 같이 살기 때문에 가족성을 유지하는 거라고.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같은 시간을 보내고, 헛소리를 하고, 헛소리를 듣는 거 말이야. 우리만 아는 모습들을 우리끼리만 보는 그런 거, 그런 건 가족끼리만 하는 거야. 나는 우리 세 사람이 이제부터 영원히 각자의 집에서 따로 살아야 된다고 했을 때, 속상했다. '우리 가족'은 이제 변할 거여서.
아빠는 새로운 배우자와 새 가족이 되었어. 다른 사람과 공간을 공유하고, 시간을 보내고, 헛소리를 하고, 헛소리를 듣는 거. 우리는 이제 아빠랑 못 하는 거. 너랑 나랑도 못 하고 있는 거. 아빠는 여전히 아빠지만, 옛날의 아빠가 아니다. 그리고 이건 사실 서운해할 만한 일도 아니야. 내 말에 정우는 말이 없다.
나는 전에 없던 모습을 보이는 정우가 신기하면서 한편으로 안쓰러웠다. 정우에게 '누나는 옛날의 그 누나 맞아'를 최선을 다해 보여주고 전화를 끊었다. 내 동생이 F가 되었다니.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 상태를 무시하지 않고, 그걸 느낀 순간 멈춰 서서 인식까지 하게 되었다니. 놀라울 일이다.
멀어진 것 같은, 괜히 어색해진 관계를 다시 되돌리는 나만의 방법이 하나 있다. 내가 알려줘 봤자 정우가 따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답은 '선 넘기'다. 아마 정우는 못 할 거야... 정우는 옛날부터 그런 나를 엄청 싫어했으니까. 정우는 내게 내 공간 좀, 내 시간 좀, 내 생각 좀 침범하지 말라고. 아무리 가족이어도 적당한 거리를 두자면서 화를 냈고 나는 아랑곳도 안 했다. 내가 미저리처럼 보였을 거라는 거 알아. 미안. 근데 있잖아. 적당한 거리를 두면 너랑 아빠처럼 돼.
꼭 가지고 싶고, 옆에 두고 싶고, 잃고 싶지 않은 사람한텐 선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야 될 말, 하지 말아야 될 말 그런 구분 같은 건 없어. 안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마음은 이만큼만 줘야지, 뭐 그런 것도 난 없어. 사람한테 기대하지 말라고? 결국 실망하게 될 거라고? 아니, 난 그런 생각 안 해. 기대해. 계속 실망하고, 실망해도 또 기대해. 그냥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가. 상대한테 나를 심어.
그러면 둘 중 하나다. 선을 넘었기 때문에 관계가 끊기거나, 선을 넘어가서 끈끈한 관계가 되거나.
나는 10명 중 9명과 끊기게 되더라도 한 명이 남는다면 그건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난 쉽게 변하지 않을 관계를 원해. 그러려면 내가 먼저 나를 다 줘야 하지 않겠니. 정우야 너도 그래 보렴. 아빠한테 사리지 마. 선을 넘어서 불쾌하고 화가 나고 싸우게 되는 게 훨씬 낫잖아. 환경이 조금 달라졌다고 금세 어색하고 낯선 사이가 되는 것보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