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복 몸무게 42.kg
결혼을 앞두고 매번 인생 최저의 몸무게를 갱신하고 있다. 어른이 되고난 후 이렇게 날씬한 몸은 처음이다. 42kg라는 숫자는 52kg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로만 존재했던 거 아니었나. 내가 42kg에 안착하게 되다니. 빨개 벗고 거울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
사실 더 믿을 수 없는 건 쓰레기가 된 내 근력이다. 근육이 어찌나 없는지 머리를 감을 때 두 번 정도 쉬어야 한다. 팔을 올리는 것이 나에게 너무 운동이 돼. 샤워를 하면서 이것도 칼로리 소모다, 재연아 너 씻으면서도 다이어트가 되는 거야라고 내 스스로를 독려하지만 아무래도 내 몸 구석구석을 닦는 내 두 팔의 노동이 눈물겹다. ... 겨울이니까... 샤워... 이틀에 한 번해도 되겠지...
다니는 요가원이 2층에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엘리베이터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 내 허벅지에게 너무 큰 부담을 줘. 몸무게가 줄면 줄 수록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행동이 운동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칼로리 소모도 되고, 근력 운동도 되고, 더 좋은 거 아닐까? 남들은 그냥 하는 거 나는 힘들여서 하는 거니까 이거 내 몸에 운동인 셈 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세상은 항상 내가 억울한 쪽으로 돌아간다.
70kg 성인이 천국의 계단 20분 타면 소모 칼로리 200kcal.
근데 42kg 성인이 천국의 계단 20분을 타면 소모 칼로리가 60kcal이란다!
왜!!!! 왜냐고! 70kg가 운동하는 것보다 내가 운동하는 게 더 힘들게 운동하는 건데 왜!!!
... 운동은 힘듦의 기준으로 칼로리 소모가 되는 게 아니란다. 몸이 작아질 수록 들이는 에너지도 적어져서 남들이랑 똑같이 운동해도 칼로리 소모가 적은 거래... 억울하다. 더 힘들게 운동하고 더 적게 빠진다. 억울해. 억울하다고요. 이 세상의 시스템이 아무래도 잘못 설정된 것 같다.
집에 있는 바지들이 너무 커졌다. 허리띠가 없으면 입을 수 없는데, 허리띠를 졸라 맨다고 해도 통이 너무 남자한복핏이다. 다리에 맞는 새 옷을 사야하지만 나는... 요요가 올 것이기 때문에 작아진 몸에 맞는 바지를 사기가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입는 모든 바지가 힙합바지화가 되었다. 너무 큰 옷에 너무 작은 몸이 들어가 있으니 아무도 내가 살 빠진지 모른다. 나는 또 억울했다. 그래! 오늘은 진짜! 내가 살빠진 거 자랑 좀 해야겠어!
나는 클라이밍하러 가기로 결심한다. 다리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를 입을 것이다. 상의도 나시를 입을 거야. 그것도 홀터넥 나시. 내 날씬해진 몸이 얼마나 잘 드러나겠어. 후훗. 지난 3n년을 흥선대원군처럼 살아왔던 나의 쇄국정책이 깨지는 순간이다. 개방하라. 내 몸 개방하라!
클라이밍 센터로 가는 내내 생각했다. 거기는 300평이 넘는 곳이고 후훗 사람도 바글바글한 곳이고 후훗 내가 클라이밍을 이제 5년 정도 했는데 후훗 아는 사람 한 명 없겠어? 후훗 우연히 아는 사람 만나서 '어머! 살 엄청 빠지셨다!' 소리를 들으면 후훗 자랑은 하지 않았지만 자랑의 효과를 꽁으로 얻겠지? 후훗
센터에 도착해서 운동복을 갈아입었고 나는 알게 됐다. 오늘 하루가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임을. 운동복으로 나시를 챙겨왔는데 겨털을 밀지 않은 나. 내 사회적 수명은 여기까지인가. 나는 나를 로그아웃 시키고 싶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괜찮아 재연아. 너 그렇게 수북하지 않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누가 너 겨드랑이에 신경 쓴다고 그래. 진짜 고재연 너, 자의식 과잉이다. 오케이. 자가 세뇌 성공. 사회적 수명 연장 완.
최대한 팔을 벌리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내 계획은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마주쳐서 나의 날씬한 몸을 자랑하는 것이었는데 300평의 공간을 가득채운 인파들 중 아는 얼굴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지 말자. 시작부터 계획에서 틀어졌지만 당황하지 마. 인생은 예상치 못한 선물을 가져다주기도 한다고.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려고 해도 겨드랑이를 오픈하지 않으려고 티라노사우르스처럼 클라이밍하고 있는 나로선 제대로 된 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팔을 제대로 뻗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그때. 뽈록. 뭔가 이상한 감각이 가슴팍에서 느껴졌다. 뭐가... 뭐가... 홀터넥 끈을 뚫고 탈출했다. 내 가슴팍에서 뭔가가.
그것의 정체는 브라캡이었다. 그러니까 뽕. 뽕브라할 때 그 뽕이요. 모두 애도를 표해주세요. 방금 저의 사회적 수명이 조용히 숨을 거뒀거든요. 300평의 공간, 그 공간을 가득채운 인파. 그리고 나의 뽕. 죽고 싶었다. 죽고 싶다는 표현을 최대한 안 쓰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안 쓸 수가 없다. 날씬한 몸 자랑은 무슨, 내가 지금 무얼 자랑하고 있는 것인가. 내 몸 쇄국정책을 깨겠다고 결심하자마자 너무 많이 깨버린 거 아닌지... 고재연 너, 어디까지 보여줄 셈이야. 도대체 넌 수치를 몰라? 어? 모르냐고.
안다. 수치를 알아. 수치를 아니까 지금 죽고 싶은 것이다. 몸에 살이 빠지니 나에게 맞는 스포츠 브라가 오늘 입은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캡이 없는 버전이기 때문에 캡을 따로 넣었어야 했는데, 귀찮아서 뽕을 아무렇게나 껴넣는다는 것이 결국 이런 재앙적 결과를 불러온 것이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나의 계획이 틀어진 것은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아는 사람을 만났으면 나는 그 아는 사람과 인연을 끊고 우리는 결국 모르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날씬해진 몸을 자랑하고 싶어서 외출을 했지만 어떻게든 내 몸을 숨기려는 급급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결국... 나 살 뺀 거 나만 안다. 이대로 나만 알고 끝나게 될 것만 같다. 여름이 올 때까지 요요를 방지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내 다이어트는 약간... 몰래 카메라같다.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나만 깜짝 놀란다. 나 진짜 살 많이 빠졌는데... 진짠데... 이거 뭐 보여줄 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