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빡친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을 다녀오고 씻고 요리를 해먹고 설거지까지 하는 시간 동안 전화를 몇 통이나 했는지 모른다. 전화가 걸리는 내내 전화기 안에서는 사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폭언이나 욕설을 할 경우 내게 불이익이 생길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전화를 이렇게까지 안 받음으로서 폭언과 욕설을 유도해놓곤 하기만 하면 내게 불이익을 줄 거라니. 이건 함정수사다.
최근, 일하던 곳에서 업무가 종료되었다. 나는 이제 백수다. 그런데 나라에서는 계속 나에게서 돈을 앗아가고 있다. 나는 나라에게 내가 지금 백수라는 사실을 증명해내야 해. 그러기 위해 일하던 회사에 해촉증명서를 요청해 받았다. 국민연금공단 고지서에는 문의 사항이 있다면 혹은 자세한 안내를 받으려면 전화를 하란다. 그래서 난 전화를 했어. 전화를 하래서 전화를 했는데 왜 안 받느냔 말이야.
직접 가야겠다. 그게 더 빠르겠어. 잠옷 위에 추리닝 바지를 아무렇게나 껴입고, 상의는 잠옷인 채로 그 위에 패딩을 입었다. 거기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설마 누가 내 패딩을 벗길 일이 생기겠어?
맹렬하게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내내 몸이 점점 후끈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날이 그렇게 춥지 않구나? 따듯한 날이네... 패딩은 오바였어. 이솝우화가 떠오른다. 해와 바람이 저기 지나가고 있는 나그네의 옷을 누가 먼저 벗길지 내기를 한다. 바람이 아무리 힘을 써도 나그네는 옷을 점점 더 꽉 여밀 뿐이었다. 이제 해 차례. 해가 주변을 뜨겁게 만들었더니 나그네는 자발적으로 옷을 다 벗어던졌다. 해가 이겼다. 그래, 우리 동네 해도 이겼다. 나는 패딩을 자발적으로 벗어던지고 싶어졌다. '누가 내 패딩을 벗길 일이 생기겠어?'의 '누'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은 전화를 안 받고, 내가 직접 행차해야 되는 것도 서러운데, 나는 지금 너무 나그네다. 옷을 벗어던지고 싶은 나그네. 하지만 나그네에겐 수치심이라는 게 있다. 이것을 벗어던지면 안에서 귀여운 잠옷이 까꿍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런 수모를 셀프로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른 일을 해치워야 한다. 자, 패달에 힘을 더 주는 ㄱ
"저기요!"
- 네?
"**병원 가려면 어떻게 가야 돼요?"
- 음... 앞으로 쭉 직진하셨다가 오른쪽으로 가세요.
자, 다시 패달에 힘을 주는 ㄱ... 아! 왼쪽이다.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가셨어야 돼. 나는 패달에 힘을 더 주고는 나에게 길을 물은 아주머니를 쫓아갔다. 죄송한데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었어요.
"앞으로 쭉 어디까지 가라는 거야?"
- 아... 음... 어디까지라고 설명해야 하지... 음... (후) 따라오세요...
나는 너무 덥다. 빨리 일을 끝내고 집에 가서 이 옷을 벗어던지고 싶다. 내 마음과는 반대로 내 몸은 국민연금공단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인중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얼굴이 벌개졌다. 이 패딩, 기능이 정말 좋구나. 한파에 입었으면 딱 좋았겠어. 오늘같은 날 말고 말이야. 다시 국민연금 공단으로 가는 내내 나는 잠깐 잊었던 분노를 다시 끌어올렸다. 가서 꼭 말해야지. "여긴 도대체 왜 전화를 안 받으세요?"라거나 "여기랑 통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라거나... 반드시 나의 민원을 접수하고야 말 거야.
국민연금공단의 문이 열렸다. 의식적으로 씩씩 거리고 있던 나는 조금 실의에 빠졌다. 노인 100명 정도가 대기실을 점령하고 있는 듯 보였고 더군다나 너무 더웠다. 숨이 턱 막힌 나에게 번호표를 뽑아주시는 분이 앞으로 11명만 기다리면 된다고 알려줬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이에 비집고 앉으면서 한숨이 푹 나왔다. 국민연금공단이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나오는 한숨이다. 국민연금공단에 볼 일이 있는 사람은... 전화를 할 생각이 애초에 없다... 그냥 오면 되는 것을... 직원을 직접 만나야만 일이 해결됐던 그 시대 때의 사람들이... 국민연금공단에 볼 일이 있다. 나는 이곳에 있는 분들에 비해 너무나 신세대였다.
그래도 괘씸해. 괘씸하다는 표현이 맞나 싶지만 답답하고! 울분에 차고! 화가 나고! 억울하고! 서운해! 전화번호는 그럼 왜 적은 거야? 전화를 하면 자세한 안내를 해주겠다는 감언이설은 왜한 거냐고. 나는 내 순서를 기다리며 국민연금공단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가는데, 이곳 어느 곳에서도 전화가 울리지 않는다. 참나. 여기엔 전화기가 없다. 폭언이나 욕설이 올라오려는 것을 뜨거운 마음으로 참아내었다. 여기서 뜨거운 마음이란, 진짜 물리적으로 뜨거운 마음. 너무 덥다.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조르르 흘러내렸다.
그냥 벗을까. 그래요 나 위에만 잠옷입고 나온 여자에요. 왜요. 뭐요. 너넨 전화도 안 받잖아. 그래 그냥 수치스럽자. 패딩의 자크를 내리려는 그때 내 순서가 왔다.
직원 : 어떻게 오셨어요?
분노에 가득찬 나의 맘 속 말: 자전거 타고 왔다!
실제 내가 한 말 : 해촉증명하러 왔습니다...
직원 : 해촉증명서 여기 팩스로 보내주세요.
분노에 가득찬 나의 맘 속 말: 참나, 이걸 전화로 말해줬으면 안 와도 됐잖아.
실제 내가 한 말 : 넵. 알겠습니다.
분명히 내가 계획했던 게 있었는데 정말...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 하나도 없다. 나는 내가 준비해온 말을 내뱉을 자신이 없다. 왜냐면... 난... 지금 변태처럼 얼굴이 붉으스름하고 이마와 인중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으며 심지어 여기다가 해촉을 증명하는 중이니까. 그러니까 누가 봐도 백수인 사람이 내가 진짜 백수라고 말하고 있는 모양새이니까 말이다.
나는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 나 여기 화를 내러온 게 아니라 내 돈 좀 덜 빼앗아가달라고 읍소하러 왔지. 사실 이들이 내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 받아주시면 감사한 거지. 쇤네, 직접 찾아봬 드려야죠. 아무렴요...
"여긴 전화 안 받을 거면서 전화번호는 왜 적어놓은 거예요?"를 말하러 갔다가 "넵" 스무 번과 "알겠습니다" 열세 번과 "감사합니다" 마흔서른백 번하고 온 하루. 사람은 화를 내기 전에 자기 주제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