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휴지 쓰는 법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

by 고니크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정기와 5년 넘게 사귀었고 5년을 같이 살았다는 이유로 나는 나를 과신했다. 나는 내가 정기에 대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정기를 모른다. 저기요. 누구세요. 진짜.


둘이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눈에서 꿀 떨어지는 시기도 옛 저녁에 지났기 때문에 우리에겐 신혼여행에 대한 설렘 따윈 없었다. 신혼여행이란 그저 결혼을 준비하면서 받은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시간, 그뿐. 실제로 발리행 비행기를 타면서도 나는 버스를 타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딘가에 실렸구나... 무감각. 비행기 엔진음도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고 기내식에도 욕심이 나지 않았다. 영하 5도였던 서울에 있다가 눈을 뜨니 영상 35도인 발리에 도착했지만서도, 공기에서 낯선 향신료 냄새가 맡아지면서도, "아룡하세요?" 어색한 한국말을 하는 가이드를 만나 고철 벤에 오르면서도 심드렁한 내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생각했다. '내가 잘 도망온 거 맞나? 한국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결혼으로부터?'


정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들뜬 기색은 없었고 단지 호갱 당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기세만 느껴졌다. 이 여행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나는 잠깐 걱정을 했다. 약간의 우려를 가지고 숙소에 도착한 나. 우와... 입이 떡 벌어졌다. 숙소는 궁궐 같았다. 발코니를 열자 장활한 밤바다가 끝도 없는 뷰가 펼쳐졌고 하늘엔 존재감 강한 별들이 콕콕 박혀있었다. 완벽했다. 그래. 이것이다. 이것이 신혼여행이다. 설레지 않을 수가 없겠구ㄴ..ㅏ...ㅏ...ㅏ...아...아아아악!!!! 그때 화장실에서 단말마가 들려왔다.


나는 정기의 비명을 듣고 화장실로 달려갔고, 아아아아악!!!!!!! 나도 함께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화장실이! 화장실이! ... 투명문이야!!!!


나는 분노한다. 통탄한다. 성토한다. 단죄하고 질타하고 비난한다. 또 너무나 격분한다. 이 참담한 현장을 보기 전까진 나에겐 하나의 믿음이 있었다. 인간에겐 콜럼버스의 본능이 있어서 밖으로는 어디든 뻗쳐 나가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웅녀의 본능도 있어서 안으로는 완벽한 실내 환경을 조성해 영원히 안전한 공간에 있고 싶어 한다고. 그래서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격언(?)까지 만들어진 거라고. 내 그리 믿었건만, 투명 화장실이라니. 이거 옛 저녁에 많은 사람들한테 규탄받고 없어진 유물 아니었어? 이게 왜 이곳에? 막 결혼해 신혼의 단꿈을 꾸며 숙소에 들린 모든 신혼부부가 무릎을 꿇고 좌절했던 지난날의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정기와 5년을 살았지만 화장실을 튼 적은 없었다. 화장실뿐이랴. 방귀도. 사실은 트림까지. 생리현상 그 어떤 것도 우리는 튼 적이 없어... 없다고. 그런데 이곳 발리에서 강제로 트게 생긴 것이다. 신혼여행 기간을 2주로 잡은 과거의 나를 붙잡아 곤장을 내려치고 주리까지 틀고 싶었다. 절망에 빠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정기의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 우리 이제 어쩌지.


첫 숙소에서의 3박은 그런대로 룰을 만들어 지켜나갔다. 신호가 온 사람이 '흠흠'하며 핸드폰으로 노래를 틀고 들어가면 남은 다른 사람은 발코니를 나간다거나 하는... 그때까지 우리에겐 3일만 버티면 다음 숙소로 이동하니까 좀만 참자는 희망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3일째, 숙소를 옮기는 날. 볼록한 아랫배와 누렇게 뜬 얼굴을 한 우리 두 사람은 또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이번엔 아예 문이 없다. 화장실에 문이 없어. 뚫렸어. 그냥 개방된 공간이라고. 왜? 왜? 왜??? 침실과 화장실 사이에는 거적때기 같은 얇은 나무 판조각이 그 경계를 간신히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판도라의 상자에도 희망이 있었는데 왜 고재연의 신혼여행 상자에는 희망도 없이 투명 화장실만 남은 거야. 이유가 뭐야. 누가 나를 미워하는 거야.


처음만 어려웠다. 뿡. 뿌지직. 그래 처음만 어려웠어. 다음은 쉬웠다. 왜냐하면 정기가 발리밸리에 걸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니 정기는 강제로 나와 화장실을 트게 되었다. 소리도, 냄새도. 음 그쪽에서 먼저 텄으니 저도 그럼 시원하게 개방해 볼게요. 그렇게 나 또한 자유를 찾았다.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워졌냐면 진짜 자유로워졌는데 얼마나 진짜냐면 진짜 진짜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내가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큰 것을 간신히 배출하곤 너무 뿌듯한 나머지 "정기야 나 엄청나게 크고 깔끔한 dong 샀어! 대박!"이라고 하면 침대에서 인스타를 하고 있던 정기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구경하곤 "우와~ 엄청나게 크고 깔끔한 dong이네!"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쓰면서도 머쓱하다. 죄송합니다.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정보를 제가 쓴 것 같기는 하네요. 자유는 단계별로 영역을 넓혀가는 분야가 아니라 무에서 유가 되듯 갑자기 모든 것을 얻어버리는 분야여서,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발코니에서 모른 척을 하던 내가 다음 날에는 dong을 자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자유는 급진적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그걸 배웠다.


음지(?)의 영역을 공유하면서 나는 정기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바로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본 후 휴지를 사용하는 방법에 관한 것인데, 다들 들어보세요. 저는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휴지를 끊어서 아무렇게나 꾸겨쥐곤 볼 일을 해결하곤 했거든요. 근데 휴지통을 보니까 (*숙소의 휴지통은 하나같이 뚜껑이 없었다) 네모 반듯하게 접힌 휴지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이거 뭐지? 싶었는데 이럴 수가. 정기는 볼 일을 처리할 때, 휴지를 쭉 길게 빼 끊어서 한 장 한 장 차곡차곡 접어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 사용한다는 겁니다! 너무 신기해. 왜? 왜 그러는 거야? 이런 사람이 더 있나? 어떤 방식이 더 보편적인 거예요?


그렇게 나는 그전까지 몰랐던, 신혼여행을 오지 않았으면 앞으로도 알 수 없었을 정기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 뭐, 몰라도 상관없었을 내용인 것 같기는 한데... 그 밖에도 정기에 대해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더 있었다. 정기는 질문을 부정어로 한다는 것. 예를 들면 "사이다 있어요?"가 아니라 "사이다는 없죠?" 같은 식. 사이다를 달라는 건가, 사이다가 없기를 바라는 건가... 한국말에 미숙한 가이드 아저씨는 매번 정기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고, 그런 두 사람의 지지부진한 대화를 지켜보는 나는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다.


또 정기에겐 이런 면모도 있다. 영어 실력에 반비례하는 거대한 자신감. 내가 아는 정기는 분명히 낯선 사람과 대화하길 꺼려하는 극내향인이었는데, 또 어떨 때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뽐내는 것이다. 쇼핑을 가려고 택시에 탔을 때의 에피소드다. 택시 아저씨는 우리를 보곤 "You’re from Korea, right? 안녕하세요~"했다. 나는 웃으며 안녕하세요~ 했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정기가 대뜸 "코리안!!" 하며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 나와 택시 기사님은 똑같은 표정이 됐다. 갑자기 코리안이라니. 우리 한국사람 맞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우리가 한국인인 게 자랑스러워서 뽐내는 건가? 맥락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정기야 왜 갑자기 목청을 드높인 거야? 정기는 아주 당당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우리가 딱 봐도 한국인처럼 보인 건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는 단어가 일단 코리안 밖에 없었어."


... 정기는 왜 자신감이 있는 걸까? 한국에선 그렇게 아무랑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냉혈한인 척 대화를 피하던 사람이 왜 여기에 와서 처음 보는 외국인 택시 기사님께 대뜸 "코리안!!!" 우렁차다니. 뭐야, 얘? 왜... 왜... 자신 있어 너...? 정기는 당황한 택시 기사님께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이 의연한 눈빛으로 앞만 보았다. ... 창피했다. 그래서 나도 앞만 보았다. 이 공기를 읽은 택시 기사님도 왜인지 자연스럽게 앞을 보았고 택시는 곧 출발했다. 우리 사이에 남은 말은 '코리안' 하나뿐이었지만 어쩐지 우리는 같은 심정을 공유한 듯했다.


발리로 출발할 때는 모든 것이 심드렁하고 무감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생기가 생겼다. 재밌고 행복했다. 나와 정기는 하루이틀 날이 지날수록, 그러니까 한국에 두고 온 현실이 조금씩 잊혀질수록 더 많이 손을 잡고 더 많이 뽀뽀했다. 매일 저녁 식사마다 짠을 하며 우리 진짜 잘 살자라는 말을 했고, 매일 밤 잠들기 전 손깍지를 끼며 이제 너랑 평생 살아야 돼라고 말했다. 아무리 반복해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이었다.


뜨거운 한증막 같은 나라에 의지할 곳은 서로뿐이라는 걸 점차 체감하게 되면서 우리는 전보다 더 상대를 사랑하게 됐다. 제삼자에게 서로를 '남편', '아내'라고 지칭하는 것이 익숙해질 무렵 우린 한국으로 돌아왔다. 차가운 한국 공기를 마시며 생각했다. 신혼여행까지가 결혼식인 것 같다고. 지난한 결혼식을 무사히 마쳤다. 오늘부로 나는 유부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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