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하다가 갑자기 그 누구보다도 MZ같았던(난 M임) 옛시절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맞는 말 하는데 왜 날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어린 재연이는 작은 하마이자 벌꿀오소리였다 이거여요,,,
촬영 이 주 전부터 '다음 촬영 때 쓸 노트북 없다. 마련하셔야 하지 않을까' 계속 말했음에도 촬영 전날 '네 집에 노트북 두 개 있는 거 알아 너꺼 둘 다 가져오면 되겠네'했을 때나
회식 때 '잘 취하고 자취하는 여자시네요'란 말을 들었을 때,
다이어트 성공 사례자의 비포 사진을 구글에서 뒤져서 생판 남의 사진을 갖다 쓰자는 피디를 대할 때,
세상이 승리 버닝썬/정준영 황금폰/뭔 국회의원 미투 사건으로 난리인 판국에 방송 아이템을 '무고죄'로 하자는 메인작가를 대할 때,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
왜인지 다들 반응이 영 좋지 않았다.
정말 괴로운 나날이었다.
난 내가 안 틀린 것 같은데, 사람들의 반응만 보면 난 빵 점 짜리 시험지였다. 그 반응이 무서워서 나는 내가 진짜로 틀린 사람이길 바랬다. 그렇다면 고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틀렸다면 말해줘, 내가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면 알려줘. 나는 아무랑도 싸우고 싶지 않고 네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단 말이야!
하지만 나에게 돌아온 피드백이라곤,
- 너 막내잖아. 막내가 그래서 쓰겠어?
엥?
- 그냥 하라는 대로해.
엥?
- 책임은 내가 질 거니까 그냥 해!
엥? 무슨 책임을 지시겠다는...? 영원히 '작가:고재연'으로 기록에 남을 건데 당신이 도대체 어떤 책임을 져준다는 거지...?
- 듣는 사람 기분 안 상하게 말해야지!
그렇다는 것은, 내용 자체는 문제 없는데 말하는 방식이 문제라는 건가?
- 그렇지! 좀 더 돌려서 말할 수 있잖아!
그건 그래, 우린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어라, 저기 메인작가님은 안 돌리고 바로 말씀하시는데..?
- 저 사람은 메인작가잖아!
엥?
나때문에 다들 괴로우셨겠지만, 나도 나 나름대로 정말 괴로웠다.
어른들의 대답이라곤 나에게 '엥?'만을 유발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당신에게 껄끄럽게 느껴지는 이유가, 그저 그걸 말하고 있는 나의 지위 문제라면, 이게 진짜 내 문제가 맞는가? 개꼰대인 니 문제 아닌가?]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네, 알겠습니다, 맞습니다,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겠는 내 자신을 책망했다.
왜 나는 도저히 조금도 굽히지 못하겠는 걸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으른이 된 나.
지금 다니는 학원에 딱 저때의 고재연과 똑같은 어린친구가 한 명 있다.
진짜 매번 맞는 말만 한다. 근데 느껴지는 묘하게 불편한 이 기분. 근데 뭐 때문이라고 말로 정의가 안 되는...
나 역시도
"저기 애야, 니 말이 다 맞아.
근데 우리 어른들은 개꼰대라 어린 여자애가 또박또박 제 생각을 말하는 걸 불편해한단다.
니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 내 잘못이라고 인정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널 가르쳐주거나 품어줄 에너지도 없어. 그냥 너가 알아서 고분고분해지면 안 될까."라는 생각만 든다.
하... 똑같은 어른이 되어 버렸다.
내 말에 저 여자애가 할 대답이 귀에 들린다.
'엥?' 이러겠지.
그 여자애도 나랑 같은 루트를 타며 어른이 될 거다.
할 말은 해야겠고, 하고 싶은 말을 못 참겠는 스스로를 너무나 미워하면서.
근데 애야 비밀을 하나 말해주자면,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고 지위가 올라간다고 해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단다. 나도 가끔은 여전히 괴로워...
이 괴로움을 조금 덜 방법을 하나 알고 있다.
지금의 너를 있는 모양대로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는 것. 나는 만났다. 처음엔 근영언니, 다음으로 자두언니.
내가 나대로 인정을 받으니까, 왜 저러는지-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 안 됐던 사람도 점차 받아들이게 돼.
신기하지.
모난 걸 깎으려고 그렇게 망치질을 했을 땐 오히려 더 뾰족해지기만 했던 마음이 쓰다듬어주니까 둥글어진다는 게.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계속 생각한다.
남들한테 사랑받는 애들은 걔네들한테 쭉 사랑 받으라고 하고 나는 미움 받는 애들, 혼자 있는 애들, 외로운 애들, 혼란스러운 애들을 봐 줘야지.
그렇게 고재연1, 고재연2, 고재연3 .... 고재연무한대 만들어 내야지. 세상을 정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