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은 위아래 몇 살까지를 친구로 여기는지 궁금하다.
나에게 14살 어린 친구가 있다고 하면 다들 에이~~ 하거나 풋 이런다. 아니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 있지, 나도 조카랑 친구처럼 지내니까라는 말을 하거나.
나는 수다를 떨고 만나서 밥을 먹는 정도의 사이를 말하는 게 아닌데. 내가 말하는 건 정말 '친구'다. 친.구.
인생 고민을 나누고 똑같은 결의 감정을 나누는 그런 관계 말이다.
그럼 다들 나를 에잉 쯧쯧하는 표정으로 본다. 나이 먹고 그렇게 어린애랑 그런 감정을 나누고 있다고? 나이 헛으로 먹었네. 니 정신 연령이 문제네! 나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은가 보다.
그 표정 앞에서 내가 말문이 막히는 이유는 그게 맞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나이에 비해 정신연령이 어린 것 같고, 세은이는 나이에 비해 좀 노숙하다.
우리의 인연은 5년 전에 시작됐다. 세은이가 중2, 나 29살.
실내 클라이밍 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나랑 키가 비슷한 여자애가 다이노(*점프로 위로 올라가는 클라이밍 동작)를 거진 2미터를 뛰고 있는 거다.
사람이 진짜 2미터를 뛰었다니까? 헛것을 본 게 아니라 정말로 2미터였다. (헛것 맞음) 키가 작아도 클라이밍을 저렇게나 잘할 수 있다니. 당장 달려가서 인스타를 땄다. 그리고 그날 저녁 디엠을 날렸다.
"다음 주에 같이 운동해요. 저 나중에 진짜 세은 님처럼 클라이밍 잘하고 싶어요."
- 아, 제가 다음 주부터는 중간고사가 있어서...
중간고사? 중.간. 고. 사?
잠깐 대학생도 중간고사를 봤던가? 어려 보여서 대학생인 줄 알았더니만 고등학생이었단 말이야? 와, 고등학생이었다니.
"고등학생이셨구나! 몇 학년이에요? 이제 곧 수능이네요?"
- 저... 중학생인데요.
...... 답장을 하지 않고 인스타 창을 닫았다.
내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는 고등학생까지였어. 이것도 진짜 많이 봐준 거라고. 도대체 중학생들은 평소에 무슨 대화를 나눈단 말인가.
만나면 입에 초코에몽을 물리고 손엔 슬라임을 쥐어준 뒤 하츄핑을 틀어줘야 하나? 중학생은 뭐 하는 애들이야?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단어를 쓰고 어떻게 말을 하는 생명체란 말인가.
세은이를 만나기 싫어졌다.
어떻든 결국 우리는 친해졌다.
난 운동 능력이 월등한 세은이를 존경했고 존경하는 만큼 그녀 앞에서 온갖 재롱을 떨었으니까. 세은이는 나를 참 웃겨했다.
세은이랑 놀면서 난 매번 이런 생각을 했다.
세은이는 지금 어려서, 뭘 몰라서 나에게 반말을 하며 언니!라고 하는 거야. 조금만 더 나이가 들면 나를 어색해하면서 호칭도 언니에서 저기... 저...로 바뀔 게 분명해. 마치 어릴 땐 명절마다 만나는 친척에게 반말하며 까르르 놀다가 사춘기가 지나고 오랜만에 보면 저절로 존댓말이 나오는 그런 법칙처럼 말이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내가 40살이 되면 세은이는 26살. 앞자리 2와 4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거다. 내가 40살이 되는 날, 세은이는 나한테 존댓말을 할 거야. 너무 마음 주지 말자.
너무 마음 주지 말자고 결심해서일까.
나는 세은이에게 마음 말고는 다 줬다. 내 일거수일투족 이야기, 내 인간관계 고민 이야기, 사랑 고민, 연애 상담, 가족 상담, 친구와 싸운 이야기,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A와 B 중에 뭘 골라야 할지 등등... 어차피 세은이는 나한테 존댓말을 하면서 멀어질 아이니까 내 모든 걸 말해도 얘는 언젠간 다 까먹겠지.
그렇게 5년이 흘렀다. 내가 40이 되려면 6년이 더 남았다. 그래서인지 다행히 세은이는 여전히 내게 반말을 한다.다이노도 여전히 2미터를 뛴다.
달라진 거라곤 세은이가 성인이 됐다는 거. 세은이의 첫 술을 내가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가르침은 되레 내가 받았다. 나보다 술을 더 잘 먹는 너... 운동이든 술이든 세은이가 날 알려주고 있다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난 여전히 세은이에게 미주알고주알 내 모든 것에 대해 말하고 세은이는 들어준다. 어차피 떠날 애라고 생각하면서 세은이의 손바닥 위로 자발적으로 올라간 나. 이제 세은이가 떠나면 난 그 손바닥에서 떨어져서 즉사다.
얼마 전 일이다. 나는
1. 치매 노견 마시에 대한 고민
2. 내 애매한 재능
3. 현저히 적은 돈벌이
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이번에도 세은이한테 털어놓았다.
털어놓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서 룰루~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띠링 카톡이 울렸다. 답장이 온 거다.
[세은이의 답장]
1. 마시
: 난 좀 자연주의(?) 관점에 있어서 개 키우는걸 좀 이해 못 함ㅎ 자연상태의 개를 왜 굳기 잡아다 키우느냐? 사실 개의 행복조차도 너무 인간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아닌지.
물론 개는 옛날부터 인간과 밀접했다지만 그게 현대의 방식을 뜻하는 건 아니잖아.
인간이 행복을 느끼고 감정을 가지는 것도 지성의 산물이라 볼 수 있지. 그렇다면 개의 관점에서 봤을 땐?
어쩌면 개의 행복이라는 거 자체가 모순 일 수 있다고 생각해.
개를 안 키워본 입장에서 차갑게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개가 주인을 좋아하는 것도 생존 본능에서 기인된 거니까.
마시가 언니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바뀌진 않을 테지만 어떻게 보면 마시 입장에서 죽음으로 이별하는 일은 슬픈 일이 아닐 거야. 그건 그냥 자연의 법칙이니까.
언니는 인간이기에 마시에게 생존본능 이상의 감정을 느끼겠지. 하지만 언니가 사랑하는 상대는 인간이 아니잖아. 그러니 마시의 죽음, 부재를 그저 자연현상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
물론 말이 쉽지 당장은 감정적으로 힘들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최소한 마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론적으로 슬픔, 우울, 결별의 아쉬움은 느끼지 못할 테니 그 부분에 대해 죄책감 갖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야.
2. 재능
: 어떤 인강강사의 문물을 봤는데, 학부모가 “자질은 충만하지만 게으른 아이”라는 평을 들어 고민이라는 내용이야. 거기게 강사는 ’그냥 공부가 싫은 아이‘의 완곡한 표현이다라고 답했지.
나도 동의해. 난 자질이란 결국 총량이라고 생각해. 자질=재능 은 아닌 거 같아. 재능 50+노력 50인 사람이 재능 90+노력 0인 사람을 이긴다고 생각하거든.
재능은 반짝하는 순간적인 것인데 반해 노력은 아주 느리고 어쩌면 끝이 없는 것 아닐까. 그렇기에 노력은 누구나 시작할 수 있다지만 빛을 발하는 사람은 드물지. 난 언니가 그 과정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
언니가 지겨움을 느낄수록, 회의를 느낄수록 언니의 노력은 오래된 것이고, 빛을 볼 날이 가까워지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하니 아무나에서 한 명이 되어가는 과정인 거지.
참 당연한 얘기 일 수 있지만 가끔 우리는 당연한 얘기도 잊게 되잖아. 그러니 그냥 주저리 설명 해봤어.
3. 돈
: 최근 나도 돈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ㅎ 일을 시작하고 내 또래 치고는 꽤 잘 버는 편이니까.
그러니 난 막연히 내 통장에 돈이 막 쌓일 줄 알았지. 근데 아니더라ㅎ(당연함) 암튼 그래서 너무 현타가 오는 거야. 성인 되면서 용돈 끊기고 주거비용 빼고는 내가 나를 다 부양하니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걸 뼈저리게 느낀 거지. 그래서 한동안 돈 쓰는 게 괴로웠어. 그 소비가 꼭 사치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더라도.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더라.
내가 살면서 필수적으로 내는 돈도 괴로우면 내 삶의 목적 자체가 돈으로 바뀌는 거 아닌가 하고. 전에는 내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목적이 전치된 거야.
내가 행복하지 않는데, 내 목표에서 멀어지는데, 수단 따위인 돈이 있어봤자 뭐 하지? 싶더라고. 그래서 그때부턴 돈을 쓸 때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생각해.
버스 탈 때에는 내 편리를 생각하고 학원비를 낼 때는 내 미래를 생각하고.
물론 그래도 아까울 때가 있지만, 그때에는 다시 돈의 의미를 생각해. 돈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일 뿐이라고.
...
14살 어린 친구를 뒀다는 사람에게 짓는 보통 사람들의 선입견 가득한 표정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니 정신 연령이 그 정도로 어린 거겠지! Shame on you!'
네. 쉐임 온 미. 부끄럽습니다.
내가 세은이한테 보냈던 고민 문자는
[이이이이이잉ㅇ 힘드러 몰라 몰라 마시 죽으면 나 어케 살아. 인생 망한 것 같애. 나 돈도 없는데!!!!!! 몰라 너가 빨리 취직해서 나 부양해!]였다.
나 뭐야? 몇 살이야?
아니 박세은 넌 뭔데? 너 몇 살인데?
왜 날 부끄럽게 만드는 건데?
몰라, 몰라. 정말 모르겠다.
그나마 하나 알겠는 건 내 인생은 안 망한 것 같다는 것.
인생의 귀인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나이로 찾아오는구나.
다른 사람들은 위아래 몇 살까지를 친구로 여기는지 궁금하다. 사랑에는 나이도 성별도 국경도 없다면서 우정에 있어서는 확실한 선을 그어놓는 사람들에게 우리 세은이를 보여주고 싶다.
여기요. 세은이 좀 봐봐요.
우정에도 나이도 성별도 국경도 없답니다.
인생의 귀인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요! 세은이를 만나고 얻은 인생의 가장 큰 깨달음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 깨달음을 얼른 얻었으면 좋겠다.
난 세은이보다 14살 먼저 태어났으니 아마 14년 일찍 죽겠지. 남들보다 14년의 시간을 덜 확보한 거라고요.
뼈저린 후회 중입니다. 좀 일찍 깨달을 걸. 모두 저처럼 후회하지 마시고. 눈을 돌리세요. 내 친구가 지금 막 태어난 갓난아이일 수도, 곧 죽음을 맞이할 90대 노인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마음을 여세요. 알았죠? 네?
이 글을 보는 당신이 누구든, 남자든 여자든, 어떤 직업을 가지고 몇 살이든. 나는 지금 당신을 놓치고 있을까 봐 불안하고 아쉽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본다면, 정말 끝내주는 친구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세은이 덕에 열린 내 마음이 새로운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안녕 내 친구, 지금 내 글을 잘 읽고 있나요?
내 글에서 어떤 걸 느끼나요?
나와 그 기분을 나누고 싶진 않으신가요?
ㅎㅎㅎ
세은이한텐 내 모든 걸 줘도 마음만큼은 절대 안 주겠다고 결심했었는데, 내게 남은 게 하나도 없는 걸 보니 이미 마음까지 다 준 모양이다. 그래도 이젠 상관없다.
내가 40살이 되더라도 세은이가 나에게 존댓말을 할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