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혼을 결심한 순간

by 고니크

이 얘기를 하기 앞서 정기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짧게 해야겠다.

음 핸드폰으로 비유를 하자면, 난 2G 모토로라폰인데 한번에 52875113개의 작업을 하는 타입이고 정기는 5G 1테라 용량 최신 아이폰16프로맥스인데 전화랑 문자만 하는 타입. 그러니까... 하 이걸 어떻게 놀림이 아닌 표현으로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말이에요. 우리 정기는 정말 너무 귀여운데... 정말 귀여워요. 귀여운데... 백치미... 아냐... 이 표현은 나만 쓸 수 있어. 음... 단순... 그래! 단순해! 단순하고 투명하고 투박하고 착한 아이.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아이, 그래 그겁니다.


올해 초에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깼는데 속상해하는 나한테 정기가 그러는 거다.


"괜찮아! 땜빵한 거야."

... 액땜이겠지...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많이 울었던 날 이야기를 하며


"우리 할아버지 화형하실 때 많이 울었어..."

... 화장이겠지 정기약!!!

흑흐흑흑 할아버님 제가 대신 죄송합니다...

내가 말실수를 짚어줘도 정기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 그래? 어깨 으쓱. 그게 끝.


정기는 인정이 빠르다.

우리가 싸우느라 서로 도끼눈을 하면서 언성을 높이고 있었던 때. 나도 내 입장을 이야기하고 정기도 정기 입장을 얘기하고. 여기서 잠깐이라도 멈칫하면 지는 거다. 조금의 숨 쉴 틈도 없이 우다다다 쏟아내고 있는 싸움 절정의 타이밍.


내가 "너가 그러면 내 기분이 어떻겠어! 어땠을 것 같냐고!!!!!!!!"

정기가 그 말에 인상이 찌푸린 채로 바로 맞받아치는 거다. "그건 나였어도 속상했을 것 같아!!!!!"

나는 씩씩거리면서 "그래!!! 넌 맨날 그런 식이ㅈ... 어?" 잠만... 여기서, 지금 이 바이브에서 정기가 나를 공감해주는 말을 하는 게 맞나...? 조금 당황했지만 이 싸움의 기세를 쭉 이어가고 싶었던 나는 또 다시 "그래서 잘못 했어 안했어!!! 잘못 했어 안 했어?!?!!!!" 그러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기가 "잘못했지!!!"


...어? 그... 그래? 아... 잘못했다고 생각하는구나... 잘 생각했네...ㅎ... 정기의 텐션은 그대로인데 나만 머쓱해졌다. 갑자기 귀 뒤 쪽 뒤통수 어딘가의 두피가 가려워지는 이 기분.


나는 또 머리를 박박 긁으며 "어... 그럼 우리 화해야...?" 웅. 미안해. "그... 그래..." 우리의 싸움은 오래 가지를 못한다.


정기는 무뚝뚝하다. 감정 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편인데... 그래서 내가 원하는 알콩달콩 뿌잉뿌잉 잉셍상엥장깅밖엥없엉용뿌! 이런 거는 정기와 꿈도 못 꾼다. 연애 초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쩡기! 나는 너한테 어떤 사람이야~?" 물었더니,

정기가 "누나는 턱걸이같은 사람이에요."


와... 내 생에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낭만적인 말이다.


"계속 당기고 싶어서? *_*" 아뇨. 당길 수록 힘들어요.


와... 내 생에 들었던 말 중에 가장 개빡치는 말이다.


하긴 정기는 이런 적도 있다.

사랑에 미친 내가 레스링부 선수처럼 정기 위에 튀어올라 뽀뽀세례를 퍼부었는데, 사약을 마시는 표정으로 그 순간을 견뎌내더니


"재연이는 자동적인 여자야."

- 그게 무슨 말이야?

"어머니는 수동적인 분이셨다며, 어머니를 안 닮은 것 같아."


그니까 지금... 수동적의 반댓말로 자동적이란 표현을 쓴 거니. 정녕 그런거니. 정기에게 '소극적'과 '적극적'이라는 단어를 알려주지 않은 현세대의 국어교육 실정을 규탄한다. 여튼 이런 정기가, 나에게 너무너무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운 정기가, 나를 엉엉 울렸던 일에 대해서 이제부터 말해보려고 한다.

내가 그날 결혼을 결심했거든.


재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정기의 누나, 그러니까 새언니가 조카를 낳았는데 너어어어어어무 귀여운 거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귀여운 아기를 처음 봤다. 이게 막 인형처럼 귀엽다는 느낌은 아닌데... 뭐랄까... 진짜... 진짜... 장난이 아니고 진짜 그냥 진짜 귀여운 거임.


이 세상엔 정말 많은 단어들이 있지만, 그러니까 칠레 어디쯤에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만 굳이 스스로 하고 싶지는 않은 일에 대해서 상대방이 자원하여 해 주기를 바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하면서도 긴급하게 오가는 미묘한 눈빛]을 뜻하는 단어 Mamihlapinatapais (= 우리 말로는 ‘조장하실 분?’)도 있다는데, 조카의 귀여움을 표현할 단어만큼은 그 어디에도 없다.

정말 확.실.히. 없다.

국립국어원 원장님 손목 걸고 진짜 없음. (죄송합니다 원장님)


나는 단박에 정기 조카에게 사랑에 빠졌다. 조카를 만나려고 정기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완전한 홀릭. 나는 매일 정기를 닦달했다. 조카 사진 보내달라고 해줘, 동영상 뭐 받은 거 없어? 받자마자 나한테도 공유해줘. 나도 OO이 낳을래! 그런데 어느 날 정기가 조카의 동영상을 하나 보내줬는데... 이게 나를 엉엉 울렸다.


조카가 누워서 모빌을 보고 있는 짧은 영상이었다. 근데 영상 속에 그 영상을 찍는 새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다. “OO아~ 여기 좀 봐봐~ OO아~” 별말도 아닌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니, 내 위랑 신장 그 사이 어디쯤 텅 빈 공간에서 뜨겁고 미끄덩한 뭔가가 내 눈물샘까지 치고 올라왔다.


나는 누구나 자기 안에 텅 빈 주머니를 하나씩 차고 다닌다고 생각한다. 뭘로라도 채워지고 싶은 그 빈 주머니가 사람을 말하게 하고, 표정 짓게 만든다고. 어차피 채울 수도 없는 그곳을 어떻게든 채우려고 사는 게 인생인 것 같다고.


내 주머니에서 올라온 그건, 아주 많은 것들이 섞여있어서 제대로 분간하기는 어려웠지만, 이 세상에 있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부러움’이었다. 아, 나는 조카가 너무 부러웠다. 조카한테는 있네. 본인 목숨 바쳐서라도 자기를 사랑해줄 사람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보다 더 날 사랑해 줄 사람이 조카한테는 있네. 나는 없는데. 나는 이제 없다. 없은지도 꽤 됐고, 내가 뭘 어쩐다 해도 다시 만들 수도 없다.


내 텅 빈 주머니. 영원히 텅 비어 있는 곳, 엄마의 자리.


나는 조카가 정말 부러웠다. 너는 사랑 받고 있구나. 목숨 같은 사랑을 받고 있구나. 그런 걸 받는 줄도 모르면서 잘 자고 있네, 조카는.


엄마가 살아있던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엄마를 꽉 잡고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먹는 것을 먹고, 가는 곳을 따라가고, 엄마가 잘 때 깨어있고, 엄마가 깨어있을 때도 깨어있어야지.

날 자기 목숨보다 사랑해줬던 사람. 내가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을 때, 분명히 그랬을 때가 있었는데 난 몰랐을 때, 그때로 돌아가면 난 하루에 천 번 엄마한테 뽀뽀를 할 거다. 그리고 다시 돌려달라고 해야지. 대신 하루에 하나 씩만 돌려달라고 할 거야. 내가 준 뽀뽀의 수만큼 똑같이 내가 돌려받을 때까지 내 옆에서 절대 떠나지 말라고 할 거야.


내가 조카의 영상을 보고 난데없이 울기 시작하니까 정기는 너무나 당황했다. 겨드랑이에 갑자기 우투리 날개가 생긴 것처럼 양팔을 푸드덕대더니, 나를 스프에 밥 말아 먹는 사람 보듯이 쳐다봤다.


“왜 울어?”

응... 엄마가 보고싶어서... 엉엉.


정기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나를 내버려두고 안방으로 도망쳤다.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서 울며 생각했다. 나도 엄마가 있었는데 말이야. 가끔은 그게 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 왜 사람은 꿨던 꿈을 다시 또 꿀 수는 없는 걸까? 꿈도 녹화가 가능했으면 좋겠어. 가장 최고화질로 다운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때 도망갔던 정기가 패딩과 목도리와 장갑으로 무장한 채로 다시 나에게로 왔다. 내게도 목도리를 둘러주며 “가자”했다.


어딜?

“어머니한테.”

지금 새벽 3시야, 정기야.


정기는 무슨 상관이냐는 눈으로 나를 봤다. 난 조용히 정기 차 옆자리에 탔다. 엄마 산소까지 한 시간 반은 운전해야 하는데... 정기는 중간에 맥도날드도 들러서 햄버거랑 감자튀김, 맥너겟, 콜라도 샀다. 그것들을 엄마 산소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건들지 않았다. 우리 엄마한테 드리려고 샀구나.


근데 막상 산소에 도착했는데... 진짜 너무 깜깜한 거다. 거기는 시골이다. 가로등이 없다. 불빛 한 점 없는 곳을 가보셨나요? 차의 상향등까지 다 켜도 고작 앞 50cm 거리만 간신히 보여요...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었던 건 전생의 일처럼 느껴졌다. 눈물은 쏙 들어가고 대신 겁이 내 피부에 오돌토돌한 것을 돋게 만들었다. 아니 여기... 우리 엄마만 있는 게 아니고... 몇 백, 몇 천 개의 무덤들이 모여있는 공원식 산소란 말이야, 정기야. 어머! 저기 저거! 귀신 아니야?!?! 나는 이 감동적인 여행을 추모공원 입구정도에서 끝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 엄마 안 봐도 돼. 다음에 보면 되지? 엄마는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시는 걸? 정기야, 집에 가자!


“안 돼. 보고 가야 돼.”


아니... 우리 엄마도 나 여기까지 온 거 알았을 거야. 만족하셨을 거야. 나? 만족해! 아주 만족해! 잠깐 저기 슬쩍 스쳐지나간 거 뭐야? 꺄아아아악!!! 귀신이다!!


“귀신 같은 건 없어.” 정기는 단호했다.


근데 정기야... 귀신이 없다니... 우리 엄마도 엄밀히 따지면 귀신일 걸...


너무 어두워서 나는 엄마 무덤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새벽 4시 반에 수백수천개의 무덤들을 헤치며 엄마 무덤을 찾기 시작했다. 정말 말그대로 한.치.앞.도.안.보.였.다. 스산한 기운, 이슬 때문에 바지 밑단이 축축하게 젖는 찝찝한 느낌. 너무 무서워서 나 진짜 오줌 쌀 뻔했다. 하지만 정기한테는 한 톨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셜록홈즈인 것 같기도 하고, 콜롬버스인 것 같기도 하고... 정기는 우리 엄마한테 맥도날드를 주기 전까지는 절대 이 짓을 그만둘 것 같지 않았다. 사람 살려... 죽은 자들 사이에서 난 그런 소리를 감히 내뱉었다.


30분 쯤 돌아다녔나, 드디어 엄마 무덤을 찾았다. 맥도날드도 드리고 그 앞에서 수다도 떨고, 정기는 엄마한테 보여준다며 엉덩이로 이름 쓰기 같은 것도 했다. 엄마는 안 보고 싶었을 것 같긴 한데... 나도 안 보고 싶었거든... 왜 하는 거야, 그건? 정기는 사위 사랑은 장모님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사위 사랑이 장모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정기는 어떤 사랑 하나를 얻은 것 같기는 했다. 내가 그 순간 정기를 영원히 사랑하게 됐거든. 이 타이밍, 이 시점이 내가 정기와의 결혼을 결심한 순간이다.


나는 정기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정기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다. 우리는 입이 얼어 많은 말을 할 순 없었지만, 그 순간 스틱스강에 맹세했다. 우리는 우리 뿐이야. 이제 앞으로 영원히.


후일담.

사실 정기는 그 어둠 속에서 무덤 사이를 헤치며 다리가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고 했다. 몸이 너무 찬데 흘리는 식은땀은 그것보다 더 차서 놀랐다고. 내 눈엔 정말 하나도 안 무서워 보였는데 말이지.

귀엽고 멋진 정기. 사랑하는 나의 정기.

어때요? 정말 인정되는 순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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