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견례 기선 제압하는 방법

매운 고추가 작다

by 고니크

상견례 날짜가 잡혔다.

정기 가족은 울산에 계시고, 우리 가족은 인천. 어디서 하면 좋을까?


양가 부모님께 의사를 여쭤봤다. 나는 내심 다들 본인 쪽에서 하시겠다고 하면 어쩌지 고민했는데, 그건 아주 쓰잘데기 없는 고민이었다.


사돈댁 고생시킬 수 없지. 우리가 인천으로 올라가마.

- 아니다! 난 원래 고생하는 거 좋아했다(?). 우리가 울산으로 내려가마


예상치 못한 배려와 양보의 향연이 펼쳐졌다.

나랑 정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폭탄 돌리기 하시네...”


몇 번의 폭탄 돌리기 끝에 결국 울산으로 폭탄이 투하됐다. 우리 쪽에서 내려가기로 한 것. 그때부터 나와 아빠의 마음속에 근심의 씨앗이 심어졌다.


나 정기야... 어머님 아버님이 나 키 148인 거 알고 계셔...?

아빠 재연아... 사돈댁에서 아빠 키 165인 거 아시냐...

동시에 키높이 신발 제대로 준비해야겠다.


...ㅎ

나와 아빠는 상견례 장소가 제발 신발 벗고 들어가는 곳만이 아니길 그날부터 물 떠다 놓고 기도했다. 마치 약점은 키 작은 거 하나밖에 없다는 듯이 구는 약점투성이의 두 고씨였다. 다행히 고씨집안에는 평균키 174를 가진 남동생 정우가 있는데,


내가 꼭 가야 돼? 출근 스케줄 잡힐 수도 있는ㄷ...


정우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 두 고 씨는 “넌 무조건 와야 돼!!!!” 윽박으로 상황을 마무리시켰다.


우리는 작전을 짰다.

일단 인사하고 룸으로 갈 때, 고정우 먼저 입장해. 우리가 결코 키가 작은 집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 고 씨 집안엔 그저 나와 딸, 이 둘만 유독 작은 거라고. 나머지 고 씨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란 말이야. 하지만 아빠의 그런 전략엔 정우를 방패 삼아 뒤에서 까치발을 들고 걸어가기 위한 속사정이 있다는 것을 나는 눈치를 챘다. 왜냐면 나도 아빠 뒤에서 까치발을 들고 들어갈 거거든. 남들은 상견레 자리에서 무슨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한다는데, 우리는 어떻게서든지 덜 작아보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렇게 상견례 날이 되었다.

아빠는 뚜벅이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며 인천에서부터 차를 타고 울산까지 내려갔다. 차를 내심 자랑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상견례 시작부터 끝까지 아빠 차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었다는 점을 미리 알린다. 상견례 장소는 고급 한식집이었다. 두근.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불안한 두 고 씨의 눈이 부딪혔다. 둘의 표정을 문장화한다면... [ㅈ됐다. 신발 벗고 들어가는 곳이다!]


룸을 안내해주시는 분이 두 가족에게 ‘저 방으로 들어가ㅅ...’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와 아빠는 쏜살같이 신발을 벗고 쏜살같이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휘유. 아무도 우리가 키 작은 거 못 봤어. 앉아있으면 괜찮아!

... 아빠는 모른다. 우리는 앉은 키도 유독 작다는 사실을...


여튼 상견례의 가장 큰 장애물을 넘겨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정기의 어머님이 첫 입을 떼셨다.

굉장히 무표정. 단단한 말투.


나는 정기가 결혼 안 할 줄 알았어요. 결혼 안 하고 평생 엄마랑 살겠다고 했는데?


...! 다시 한번, 두 고 씨의 식은땀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이 공간. 그렇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두 번째 장애물을 만난 거다. 바로 경상도 언어 해석이라는 장애물. 같은 한국어를 쓰지만, 전혀 다른 톤과 뉘앙스로 말하는 두 집안의 만남. 내 머릿속은 바빠졌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정기가 결혼하는 게 싫다고 말씀하시는 건가? 상견례 싫으시다고? 하지만 어머님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은 없으셨다. 뭐지, 이게 무슨 대화지.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해야 적당한 걸까. 차라리 모스부호로 말해주세요. 러일전쟁 암호 해독하는 게 이것보다 더 쉽겠어! 고씨들 사이에서는 소리 없는 절규가 이어졌다.


가까스로 어머님의 말씀을 [결혼을 안 하겠다던 정기가 결혼을 결심했다니, 정말 괜찮은 인연을 만났나 보다. 오늘 이렇게 처음 뵈니 반갑다]로 알아듣게 된 고씨집안. 인간은 극도의 긴장 상태가 되면 평소와 다른 모습이 나온다. 난 그걸 우리 아빠를 보고 알았다. 평소 어느 정도 애교스럽지만 심드렁한 면모도 가지고 있던 아빠는, 왜인지 강호동유재석 뺨치는 전문MC가 되어 좌중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쉽게 입을 떼지 않는 자리에서 본인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는 식의 기인열전을 이어가는 아빠. 과묵하고 무뚝뚝한 경상도 바이브 속에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애처로워지는 아빠였다. 나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정기야, 제발 너라도 리액션을 해줘. 제발!


얼마 전부터 고기 알러지가 생겨서 고기를 못 먹게 된 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고기를 정우와 정기에게 덜어주느라 바빴고, 야채를 싫어하는 정기는 모든 야채를 나에게 넘기느라 바빴다. 그 바쁜 와중 정기 어머님이 다시 한번 입을 떼셨다.


(정기를 가리키며) 얘가 말귀를 잘 못 알아들어요.

애가 좀 머리가 안 좋아가지고. 답답하고.


어머니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건가요.

하지만 이 자리에서 당황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어머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아빠도


(나를 가리키며) 얘가 진짜 고집이 너무 쎄고 성격이 안 좋아요.

성질도 너무 급하고 생각도 너무 많아서 아유 너무 예민하고.


아빠...? 아빠는 갑자기 또 왜 그러는 건데. 갑자기 시작된 자식 디스전.

아무도 이기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임하시는 건데요... 난 그때부터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이 자리가 끝나길. 이게 꿈이었음 좋겠어요...


나와야 할 모든 음식이 다 나왔다. 음식의 양 조금도 줄지 않았지만 모두 배가 부른 것 같았고, 처음으로 이 공간 안의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만장일치로 모아졌다. [집 가고 싶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정기 어머님, 아버님에 비해 우리 아빠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 찰나, 갑자기 아빠가 모두를 불러세웠다.


잠시만요!


??? 왜... 아빠... 왜... 왜... 빨리 집 가자... 어?


난 내가 아빠를 말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빠의 돌발행동에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아빠가 아주 뿌듯한 목소리로


허허! 우리 단체 사진 찍읍시다!


... 아빠 빼고는 단체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알아달라.


사진을 찍으려 포즈를 취하는데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기의 누나의 남편, 그러니까 나의 아주버님이 굉장히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이거... 왜... 왜 찍는 거야...?


그리고 언니의 속삭임.


몰라...


횡단보도 신호가 분명히 빨간색인데 건너도 된다는 교통경찰의 안내에 따라 길을 걷듯이 모두가 머리를 벅벅 긁는 마음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상견례가 끝나고 우리 가족끼리 카페에 갔다. 다들 참아왔던 흥분을 토해냈다. 그때 이랬잖아, 저때 이랬잖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한 거잖아. 쇼미더머니 아직 안 끝났던 거였음. 이번에는 나도 참가 래퍼였다. 우리 가족은 드는 생각을 모조리 입으로 뱉어내야, 그걸 서로 공유해야 직성이 풀리는 가족이다.


아빠는 걱정을 덜었다고, 사돈댁 두 분 인품이 너무 좋아 보이신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아빠를 전적으로 믿는 딸이다. 아빠가 기쁘니까 나도 기쁘다. 아빠의 만족스러운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비로소 나에게 두 번째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이 체감됐다. 무뚝뚝하고 자상한, 과묵하고 조심스러운 울산 가족.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스며들어야지. 관계를 맺는다는 건 참 신나는 일이다.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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