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연인들을 만나면 꼭 물어본다.
“처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억나?”
근데 대부분 기억을 못 하더라고. 왜지? 가장 떨리고 설레는 순간 아닌가? 싶었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전 남자친구들의 첫 사랑해 순간, 기억 1도 나지 않음. 기억하고 싶지도 않지만 정말로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그렇네요. 기억 안 나는 게 맞군요.
근데 정기와의 첫 사랑해 순간은 아직도 넘 또렷하다. 내가 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 기다렸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좀 당황했지만 뛸 듯이 행복했던 그 순간, 어땠냐면...
정기와 사귀기로 한 지 한 5일 지났을 때였다. 나는 이미 뭐 거진 세 달을 혼자 열렬히 짝사랑해왔기 때문에 정기와의 사랑에 성공했다는 기쁨으로 마약에 취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던 시기. 부정맥이 온 건 아닌지 매일 네이버를 검색했다. 심장이 너무 크고 빠르게 뛰어서. 걸어가는데 내 심장 소리가 정기한테까지 들릴까 봐 옷으로 가슴 쪽을 꽁꽁 싸매고 걷기도 했다. 난 이런 남자를 만날 거야 써놨던 리스트의 모든 내용들이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홍.정.기.’ 세 글자가 깊게 박혔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기로 굳게 결심도 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잠을 푹 자지 못했다. 자다가도 항상 새벽 3시쯤이면 눈이 번쩍 떠졌다. 달리기하고 온 사람처럼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눈을 떴다가 다시 스르르 잠드는 걸 한 달은 반복했는데, 정말 신기한 건 정기도 항상 새벽 3시쯤 눈을 떴다는 거. 잠들기 직전까지 톡을 하고 새벽에 깨서 [나 깼어 보고싶어]하면 바로 1이 지워지고 답장이 오는 거다. [나도 깼어 나도 보고싶어]
처음엔 어떻에 우리가 동시에, 그것도 매일, 새벽 3시에 잠에서 깨는 거지? 신기하고 궁금했는데 점점 알게 됐다. 이 흥분상태를 몸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걸.
여튼! 난 정기랑 사귀기 한참 전부터 정기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마음을 억누르는 데에 에너지를 꽤 썼다. 정기가 정기가 아니라 정기 쌤이었을 시절해도
“정기 쌤! 이 문제 좀 알려줘요! 아 사랑해로 풀면 되나요?!”
“화장실이 어디에요? 오른쪽 코너로 틀어서 사랑해로 쭉 가라고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 사랑해살이라고요?”
이 사단을 낼까 봐 입을 꾹 틀어막았고,
정기 쌤이 정기야가 됐을 때도
‘내가 갑자기 사랑한다고 해버리면 숨 막히겠지?
사랑해라는 생각 그만하자, 그만하자, 그만ㅎㅏ...’
정기: 배고파
나: 어, 나도 사랑ㅎ!!콜록콜록콜록 사랑에이취켈록켈록!!
이 ㅈㄹ을 반복했다.
사랑하는데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왜 참아야 하냐고. 하지만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기를 사랑한지 백 여일이 넘었지만 정기는 고작 5일 정도가 지난 거니까.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정기 귀에는 늙은 마녀가 ‘너 보쌈해다가 데릴사위로 데려간다’는 말로 들릴 거니까.
나는 매일 밤 언제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해야 급하지 않고 자연스러울까 고민했다. 나는 원체 사랑이 아주 많고 그걸 모두 분출해야 적성이 풀리는 여자다. 내 안에 항아리는 너무 작아서 도저히 많은 마음을 담아둘 수가 없어. 꼭 내보내야 한다고. 나는 속앓이를 시작했다. 우스운 일이다. 정기랑 사귀고 있는데, 상사병에 걸린다니.
여튼여튼여튼! 사귄 지 5일째 되던 날. 정기네 자취방. 밤. 정기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난 땅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닌가, 폰을 하고 있었나. 여튼 딴 짓을 하고 있었어. 정기 자는 거 보고 집 가야지 싶은 맘이었다.
정기가 피곤한 듯이 마른세수를 하더니 “누나, 내가 그 말 했었나?”하는 거다. 무슨 말? 내가 정기한테 무슨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거지? 머릿 속이 복잡해져가는 와중 정기가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었나?”
!!!!! 지저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님!!! 내가 방금 뭘 들은 건가요? 뭐지? 그때부터 내 마음 속 항아리에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나 더 이상 못 참겠는데, 곧 터질 것 같은데. 큰일 나, 홍정기. 너 내 사랑에 질식하고 싶지 않으면 이제 그만 말해! 내가 물었다.
“너... 나 사랑해?”
그랬더니 정기가
“응 사랑해.”
와...... 그 순간의 기분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나에게 없다.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거 하나다. 정기는 내 인생 최고의 성취라는 것. 내가 이룰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가질 수 있는 모든 것 중에 가장 정점에 있는 것. 나는 그걸 가졌다.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사랑은, 사랑해는, 사람을 성공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