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상대가 아프거나 불구가 될지라도 옆에 있을 자신이 있을 때 결심하는 거라고, 인스타 릴스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동의한다! 그래서 커플 건강 검진을 예약했다.
건강 검진 일주일 전부터 기분이 좀 이상했다. 마치... 시동 걸린 8톤 트럭 조수석에 타야 하는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랄까. 졸라 큰 저 트럭은 당장이라도 출발할 것처럼 온몸을 흔들면서 부르릉 거리고 있고, 내 키는 1미터고, 조수석까지 오르는 저 높은 여정 너무 험난할 것만 같은... 암담한 기분. 나... 내가 과연 건강할까? 자신이 없다.
나보고 클라이밍을 하라고 하면 어찌저찌 해내겠고, 나보고 뜨개질을 하라고 해도 어찌저찌 해내겠다. 나보고 드라마 대본을 쓰라고 하면 기꺼이 써내겠지만, 근데 나보고 건강하라고 하면... 몰라욘,,, 자신 없어욘,,,
건강 검진 하루 전,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난 이미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었다. 땅땅땅. 확정. 뭔지 몰라도 살 날이 일 년 남았대. 나 이미 머리 밀었어. 이미 상상에 취해버린 나는 참담한 심경으로 메모장을 켰다. 유언을 길게도 적음. 유언을 쓰면서 너무 몰입해버린 나머지 눈물까지 한 방울 흘렸다고.
정기 불쌍해... 내가 죽으면 정기 어떻게 하지?
나는 너무 슬픈 마음으로 그날 저녁 “정기야... 너 내가 큰 병 걸려서 죽는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물어봤다. 정기가 일순 진지한 표정이 됐다. 그러다 잠깐의 정적 끝에
“그럼 재연이 돈 이제 내 거예요?”
...에라이. 바로 유언 수정함. 내 돈 사회에 전부 환원하겠다고.
정기 덕에 망상에서 빠져나온 나. 기분이 좀 상쾌해졌지만 곧 바로 첫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대장내시경 하루 전날 저녁에 먹어야 하는 이상한 물약. 바닷물보다 더 짜고 왜인지 느끼하며 은근한 점성이 있는 토할 것 같은 약. 남의 침을 먹는 듯한 그 약을 억지로 다 마셨다. 설명서를 보니 물 1.5리터도 마시란다.
저는요, 그렇게 많은 물을 한번에 마셔본 적이 없어요. 수영장에 빠져서 허우적 거릴 때도 이정도론 안 마셨다고요. 식단 관리한다고 며칠 잘 못 먹어서 줄어든 위에 물 1.5리터를 때려부으니 위가 급격하게 늘어나며 복통을 호소했다.
그때 알았다. 인간의 배는 상부와 하부로 나눠진다는 것을. 내 상복부는 위 늘어남으로 인한 고통으로 베베 꼬이고 있었고, 하복부는 이제 dong을 쌀 준비가 됐다며 품고있는 모든 것을 아래로 쏟아내고 있었다. 분명 고체가 나와야 하는 곳인데 왜인지 폭포수같은 액체가 쏟아졌다. 이럴 거면 오줌도 그냥 돈고로 싸도 되는 거 아닌가? 내 돈고는 자기가 방광인 줄 단단히 착각 중인 것 같았다. 참으로 괴로운 시간이었다. 3분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새벽 내내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렸다.
그 사이 내 돈고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보드라운 크리넥스에도 호랑이 발톱으로 긁히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그곳. 그래, 이제 널 보내줄게... 새벽 4시 더 나올 것도 없다... 고생했다, 좀 쉬ㅈ... 따르르르릉. 알람이 울렸다.
방금 한 건 1차 작업이고 2차 작업으로 지금까지 했던 걸 한 번 더 반복하란다. 하하하핳하하하! dongo야, 다음 생에 보자... ^^! 근데 이상하게도 정기는 나와 달리 약을 먹어도 신호가 오지 않았다. 두어 시간 푹 자고 일어나서 화장실 한번 가서 앉으면 끝. 그 한 번으로 클리어. 정기는 자신이 행운아인 것 같다고 좋아했다. 정기는 대장내시경 식단도 잘 안 지켰는데... 쟤 옥수수도 먹고 참깨도 먹었단 말이에요.
아, 억울해. 푹 자고 일어난 정기와 다르게 얼굴이 허옇게 질린 나. 그렇게 병원에 도착했다. 그곳에선 두 번째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키랑 몸무게를 재는데, 뭔가 이상한 거다.
띡- 144cm입니다.
“네????????? 144요? 아닌데요? 저 148인데요???
가끔은 사람들이 150으로도 봐주는데요?”
근데 화면에는 누가 봐도 144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144라는 숫자는 초등학생 때 12의 제곱을 배울 때 접하고 이후로는 볼 일 없었던 숫자였다. 이거 분명히 문제 있어. 안 돼. 나 사람들한테 내 키 144라고 말 절대 못 해. 세상이 날 속이고 있어. 내가 아무리 키가 작아도 144는 아니지. 나는 태어나서 144cm인 성인을 본 적이 없다. 근데 그게 나라고? 정기야... 난 떨리는 목소리로 정기를 불렀다.
“만약에 어떤 여자를 만났어. 그 여자를 너무나 사랑하게 됐어. 그 여자도 너가 너무 좋대. 결혼할 거래. 결혼도 약속했어. 근데 그 여자 키가 144cm면 어떻게 할 거야...?”
정기는 일순 진지한 표정이 됐다. 그러다가
“저거 기계 고장 맞아. 나도 173cm 나오더라고.
내가 말할게. 고장 났다고.”
... 내 두개골 어디쯤에서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면서 다리가 털썩 풀렸다. 다행이다... 4cm 지켜냈다... 내가 이 기계 고장 난 것 같다고 말했을 땐 꿈쩍도 안 하던 분이 정기가 기계 고장 났다고 말하니까 바로 키를 수정해주셨다. 아무래도 4cm 작게 나오는 오류가 생긴 것 같았다.
나는 몸무게 숫자를 보며, 몸무게 부분도 단단히 고장 난 것 같다고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내보았지만, 몸무게는 제대로 나온 거라는 답변이 금세 돌아왔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난 여전히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144에 대한 충격보다 더 폭력적인 숫자였다... 내 몸무게...
대장내시경 순서가 왔다. 난 그때까지 여전히 dongo의 신호에 시달리고 있었다. 선생님 제 돈고가 아직 더 나올 게 남았대요. 지금 검사 못 받을 것 같은데... 선생님? 제 말 듣고 계신가요? 저기요. 똑똑. 모아이 석상 옆에 저 선생님을 세워놔도 누가 모아이인지 누가 선생님인지 아무도 구분 못 할 거다.
“혹시... 대장 내시경을 하다가... 똥을 싸는 사람도 있나요...?”
왜인지 그게 저일 것 같아서요... 뒷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종종 있는 일입니다.”라고 했다. 휘유... 다행이다. 그렇게 맞고 기절한 나와 정기.
눈을 떴을 때 내 기분은 후련했다. 음, 좋아. 잘 마쳤군.
후후! 대장내시경 받다가 똥은 싸지 않은 모양이야! 바지 뒷부분이 아주 건조한 걸! 하하하! 그때 옆에서 정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연아 나 왜 바지 뒤에가 축축하지...?”
........ 정기야, 너 설마... ...아 아냐... 모르고 싶어.
일주일 뒤 검사 결과가 나왔다. 나한테 갑상선의 리를빗 문제가 있다는 것 빼고는 나와 정기 둘 다 대체로 정상이었다. 아... 정상이라고 해야 하나? 둘을 앉혀서 선생님이 모니터 화면으로 각자의 대장 안을 보여주는데, 검사 직전까지 쏟아낸 나의 장은 아주 깨끗했고 정기는... 아니, 잠만, 아무리 결혼을 약속했다고 해도 내가 이런 거까지 봐야 돼? 너무 한 거 아니야? 선생님 이런 거 보여주실 거면 저는 나가 있으라고 해주셨어야죠.
내가 진짜 차마 여기서 설명을 할 순 없지만, 그냥 그때 내가 들었던 생각은 이거 하나다. 정기 옥수수와 참깨 먹었다는 게 진짜였구나...
아무튼 다행이다. 정기와 나는 건강하다. 정기가 정적 끝에 “그럼 재연이 돈 이제 내 거예요?”라고 대답한 날. 삐져서 돌아 누워있는 내 뒤에서 정기가 그랬다.
“당연히 결혼해야지. 그런 어려움도 다 같이 겪고 이겨내고 싶은 사람이어서 결혼하자고 한 건데.”
난 곧바로 삐죽 웃음. 히히.
나도야. 나도 정기가 아파서 얼마 못 산다고 해도, 아니 아픈 채로 오래 살아야 한다고 해도 결혼할 거야. 왜냐면 나는 알 거든. 건강한 엄마와 함께 산 11년, 아픈 엄마를 둔 7년, 엄마 없이 산 16년,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수십 년. 그 모든 시간 속 나한텐 항상 엄마가 있다는 걸. 죽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 나는 잘 아니까. 그래서 나는 정기랑 결혼할 거야! 정기가 어떻든 우리는 영원히 함께 있을 거니까.
커플이 건강검진을 하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는가. 검사해놓고 건강하지 않으면 헤어지려고? 그런 마음으로 검사장에 들어가는 커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내가 병에 걸리면? 상대가 병에 걸리면? 그래도 사랑할 건가?하는 의문에서 그래도 사랑할 거다라는 답을 내는 과정을 거치려고. 그러려고 건강검진을 하는 거다. 몰라, 일단 나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