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 들고 무릎 꿇어 아니 꿇어주세요

프러포즈 강제 징수 스토리

by 고니크

24년 5월 상견례를 마치고 정기한테 명령했다.


"올 해 안에 프러포즈해. 무.조.건."


신종 프러포즈 삥 뜯기.

친구들이 그게 뭐냐고 한 소리할 때마다, 난 K-프러포즈가 원래 이런 거 아니었냐고 반항했다. 이거 진짜 K-프러포즈 맞다니까? K-프러포즈! K(고니크)-프러포즈! 낄낄.


나는 정기를 사랑하고, 정기도 나를 사랑하지만, 우리는 결혼을 할 거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나랑 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맘 먹은 정기의 그 결심을 보고싶다고, 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반짝이는 반지를 건넬 그를 떠올리면 벌써부터 눈물이 글썽해진다. 힝. 너 나 사랑하는구나? 나도 너무 사랑해!

해!

.

.

.


메아리가 되어 사라진 나의 글썽거림, 나의 힝, 나의 사랑.

시간이 흘러 7월이 되었다. 정기는 프러포즈 준비를 하고 있는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조급해진 나는 인스타에 글을 올렸다. 길었지만 요지는 [다들 제 왼손 약지 손가락 호수 8호인 거 정기한텐 비밀로 해주세요]. 두근두근 이쯤되면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은근~히 압박을 넣은 셈이다.


시간은 무정한 새끼다. 프러포즈에 설레어하는 나를 두고 지 먼저 달려갔다. 아니, 정기도 함께 데리고 갔을 지도. 어느새 10월. 여전히 정기에겐 프러포즈를 준비하는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11월. 프러포즈를 해야 할 사람보다 왜 받는 사람이 더 긴장하고 애 태워야하는 걸까? 이제 진짜 마지노선이다! 보통 반지는 주문해도 나오는 데에 한 달은 걸린다고! 이제는 진짜 주문해야 된단 말이야!


난 내 성미를 못 이기고 정기에게 말했다.

[정기야 반지 주문할 때 되지 않았니? 이제 해야 될 것 같아.]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좋아하는 반지 스타일은...]

... 내 프러포즈를 내가 준비하고 있었다.


12월 중순이 되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준비하고 있는 거 맞겠지? 이제 올해는 2주밖에 안 남았는데... 안 하면...? 정기가 안 하면... 난 이걸 어떤 시그널로 받아들여야하나? 프러포즈를 못 받았을 경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정하지 못 했는데 시간은 계속 갔다.


정기한테 읍소했다. 정기야... 나는 진짜 프러포즈 받고 싶어. 프러포즈 받고 싶은데... 너가 안 해주면... 아니 헤어지진 않을 건데... 나는 너무 반 년을 기다렸는데... 해주면... 안 될까? ㅠ 안 할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해줘 안 한다고 ㅠ

나는 정기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연말이 일주일 남았다. 난 그때부터 매일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왜냐? 불시에 프러포즈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프러포즈 영상에 찍히려면 예뻐야 하잖아!

그런 나를 친구들은 짠하게 봤다. 친구들이 정기에게 DM을 했다.

[정기 씨 제발 프러포즈 좀 해주세요... 니크가 집 갈때 립스틱을 발라요...]

심지어 어떤 친구는 내가 프러포즈 받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동료의 남자친구도,

상사의 남편분도,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모두 '그래서 니크는 프러포즈 받았대?'를 달고 살았다. 그러니까 정작 정기만 빼고 모두가 프러포즈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난 정기가 차에 뭐 좀 가지러 내려간다고만 해도

"프러포즈 준비하러 가?! 나 씻어? 10분 뒤에 내려가면 돼?!"


분리수거하러 내려가자고 불러도

"프러포즈야?!?!"


퇴근하는 날 마중 나오겠다고 해도

"프러포즈하려고??????"


... 이쯤되면 그냥 프러포즈를 너가 하면 안 되냐고 하겠지. 안다. 하지만 지난 7개월의 기다림이 이제는 오기로 바뀌어있었다. 어금니를 앙 물고, 반드시 받아내리라 나 자신과 도원결의를 했다.


12월 28일 토요일. 난 오늘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왜냐 낙성대 쪽에서 일하는 정기. 사당 쪽에서 일하는 나. 둘 다 퇴근 10시. 조건이 완벽하잖아? 난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어느 때보다 예쁘게 입고 화장하고 향수를 뿌렸다. 아니나 다를까! 10시! 정기에게 전화가 왔다.


"재연아 퇴근하고 바로 집 가지 말고, 낙성대 쪽으로 와."


와, 미쳤다. 이건 진짜 프러포즈다. 프러포즈가 아닐 리가 없다. 낙성대까지 운전해서 가는 그 15분동안 손에서 땀이 계속 났다. 심장도 너무 뛰고. 정기를 처음 봤을 때처럼.


난 정기한테 첫 눈에 반했었다. 몇 달을 혼자 짝사랑하던 5년 전이 생각났다.

매일 정기 꿈을 꾸고, 정기를 생각하면서 프로그램 대본을 쓰고, 상상 속에서 고백하며 울고 상상 속에서 차이고 울었던 그때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그렇게 미치게 좋아하는 남자가 나랑 결혼하고 싶다니 이건 기적이야. 나는 행운아야.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야!


볼이 벌써 발그레해진 채로 정기가 근무하는 낙성대 운동센터 앞에 주차를 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아무 표정도 못 짓겠다. 내가 아무리 불호령을 내려도 내 안면근육은 반역자가 된지 오래라 컨트롤이 안 됐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기야~"


없다.


정기는 곧 저기 구석에서 반지를 들고 올 거다. 저 공간이 숨어있다가 깜짝 놀래키면서 나오기 제격이거든. 로맨틱하기도 하고 말이야.

어쩌면 좋지. 나 너무 떨려! 뭐라고 말하지? 프러포즈 받으면 다들 어찌한단 말이냐. 뽀뽀를 갈겨? 달려들어서 눕혀? 아니면 주저 앉아서 엉엉 울어버려? 몰라, 난 일단 지금 셋 다 하고 싶다.


"정기야 나 왔어~"


그때 정기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 잠만. 화장실에서 나왔어? 화장실에서?

정기는 운동복 차림에 땀에 절어있었다. 그리고 빈 손.

뭐지? 내가 예상치도 못한 어떤 깜짝 이벤트인가? 정기가 연기를 하고 있나? 머릿 속이 복잡해지고 있는 그때. 정기가 말했다.


"나 운동하는 거 영상 좀 찍어줘."


?? 그거 찍어달라고 부른 거야?


"응. 찍어서 인스타 올리고 싶은데 찍어줄 사람이 없어."


어??? 진짜??? 어...? 나... 카메라맨 시키려고?? 어??? 아니... 나... 내가 어떤 맘으로 여길 왔는데...

누가 내 온몸 관절에 프로포폴을 맞췄나, 몸이 축 늘어졌다. 무슨 정신으로 정기의 운동 영상을 찍어줬는지 모르겠다.


운동을 해서 열이 오른 정기. 정기가 타고있는 조수석 창문 전체에 뜨거운 김이 서렸다. 반대로 운전석의 내 쪽은 차게 식어 유리창이 내 눈동자보다 더 맑았고. 한 차 안에 다른 온도의 두 사람이었다. 입을 한 일지로 꾹 다문 사람과 그 사람의 눈치를 보다 입이 멀어버린 사람.

정적.

프러포즈를 안 하는 정기보다 영문을 몰라하는 정기가 더 미웠다. 내가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알면서! 내가 얼마나 기대할지 알면서! 내가 무슨 마음으로 거길 갔을지 알면서! 너 프러포즈 하지 마! 그냥 하지 말라고! 니 프러포즈 이제 내가 안 받아!


그렇게 12월 31일이 됐다. 오늘마저 안 하면... 헤어질 거다. 물론 진심이 아니었지만, 1월 1일부터 정기를 보는 내 마음은 전과는 조금 아주 조금은 달라질 것 같았다. 난 내일이 오는 게 무서웠다.


내가 연말과 생일에 꼭 하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클라이밍. 혼란한 마음으로 클라이밍을 하러 갔다. 제일 좋아하는 운동인데도 왜인지 힘이 안 난다. 5시간은 할 생각으로 갔는데 한 시간만에 흥이 다 떨어짐. 프러포즈도 못 받고 운동도 잘 안 되고 24년 마무리는 왜 이 모양이냐 도대체...


정기가 데리러 온다고 했던 터라나와 입구 쪽에 앉아서 멍 때리고 있었는데, 정기 차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어라? 30분 뒤에 도착이랬는데 어떻게 10분 만에 왔을까? 뭐, 일찍 오면 집 일찍 가고 나야 좋지. 아무 생각 없이 차 쪽으로 걸어간 나.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그때 쭈구려 앉아있던 정기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동공은 흔들리고 있었다.


정기는 쪼그려 앉아서 셀카봉을 설치하고 있다가 빨간마스크를 마주친 눈으로 날 봤다. 차 안에는 선물 포장 박스랑 반지케이스 박스도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대박. 프러포즈구나. 아니, 안 한다며. (안 한다고 한 적 없음.)


"아... 망했어. 내가 부르면 나와야지."


미안... 다시 들어갈까?


"몰라, 망했어."


그럼 정기야. 내가 되게 뭔갈 자세히 본 건 아니거든? 근시난시 -6 정도 시력으로 얼핏 본 게 다니까 안 본 걸로 쳐도 될 것 같아. 다시 하자 다시.


"...여기 사람 너무 많아. 운동 밤까지 하겠다며."


그치? 생각보다 운동이 일찍 끝났네.


난 정기를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프러포즈는 하는 것보다 받는 게 더 어려운 일 같다.


등 뒤에 뭔가가 부스럭거리는 걸 느끼며 엉거주춤하게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우리. 정기는 조금 울적해 보인다. 내가 물었다.


"나 놀이터 가서 눈 가리고 있을까?"

그러란다.


화장도 못 하고, 운동복 차림에, 버릴까말까 고민했던 오래된 패딩을 입은 채로 놀이터 기구에 앉아서 눈을 가리고 있는 나. 정말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프러포즈가 전혀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내 입에서는 웃음이 비실비실 나오기 시작했다.


힣히 힣힣히히 나 곧 프러포즈 받는다!

나는 프러포즈를 받는 사람이야!

나는!!! 프러포즈를 받아~!

정기가 나한테 프러포즈를 한대! ㅎ힣힣히


어디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도 아닌데 내 발은 자동으로 박자를 타고 있었다. 옆에서 주섬주섬 셀카봉을 설치하고 뭔가를 꺼내는 소리가 들린다.


나 눈 떠?


"응."


그리고 ㅎㅎㅎㅎㅎㅎㅎ 이하 영상으로 확인하세요.

https://www.instagram.com/reel/DEPrwsuyM9C/?igsh=MXcwOWMzZGxrYTV2cw==


나는 무릎이 안 좋지만 점프를 1미터는 뛴 것 같다. 그것도 꽤 많이. 내 인간 케토톱 정기. 정말이지 하늘에서 계속 내 정수리를 잡아 당기는 것 같았다고. 방방. 아주 방방 뛰었다. 정말 신나.


이것이 나의 프러포즈 풀스토리. 한 남자를 강제로 내 앞에 한 쪽 무릎 꿇게 했지만 사실상 반 년 내내 두 무릎을 꿇고 손까지 싹싹 빌었던 건 내 쪽이었다. 괜히 엎드려 절 받기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네. 엎드려 받는 건 엎드린 대로 또 의미가 있구나! 예상치 못했지만 동시에 확실히 예상한 상황에서 받은 사랑 고백, 아주 내 스타일이야!


나는 프러포즈 받는 상황에서 I do라는 말을 해보고 싶었었다.


"결혼해주세요를 영어로 하면 뭐게"

- 아이 메리 유

"...응..."


영어에는 조금 약할지 몰라도 한국말로는 감동 멘트 할 줄 아는 정기. 내가 넘 갖고 싶었던 원숭이꼬리를 주면서 "동물한테 꼬리가 왜 있는지 알아? 자기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자기의 중심을 내가 맞춰줄게" 라고 했다.


정기야, I do!!! I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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