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난 작은 꽃

by 자신을사랑하기

24화: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난 작은 꽃 - 화장실의 비밀


아이가 자랄수록 집안의 공기는 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엄마가 거실에만 나타나도 까르르 웃으며 달려가 안기던 아이였다. 하지만 이제 아이는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엄마의 목소리가 섞여 있으면, 하던 놀이를 멈추고 조용히 제 방으로 숨어들었다. 엄마가 이름을 부르면 대답 대신 몸을 움츠렸고, 못 들은 척 책장에 머리를 파묻었다. 엄마와 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결코 넘을 수 없는 투명하고 단단한 벽이 매일 조금씩 두꺼워지고 있었다.


어느 비 내리는 저녁이었다. 유독 퇴근이 늦어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했다. 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아내는 소파 끝에 멍하니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딸, 어디 있니? 아빠 왔어!"


목이 터져라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심장이 발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으로 온 집안을 뒤졌다. 침대 밑, 베란다 구석, 옷장 안까지... 그러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안방 구석에 달린 작은 부부 욕실이었다.

불 꺼진 화장실, 차가운 타일 바닥 위에 아이가 곰인형 하나를 꼭 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좁은 공간에 밴 눅눅한 습기 속에서 아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떨고 있었다.


"우리 딸,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엄마가... 엄마가 또 화냈어?"


내가 아이를 안아 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아이는 한참 동안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러고는 아주 작은, 먼지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 없을 때 엄마가 그랬어... 엄마가 마음이 화나거나 이상해지면, 나보고 빨리 화장실로 가서 숨어있으라고. 아빠 올 때까지 절대 나오지 말라고... 그래야 내가 안 다친다고, 엄마가 그랬어..."


그 말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아내는 자신의 병증이 시작될 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가 없는 긴 시간 동안, 자신이 사랑하는 딸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린 아내가 아이에게 가르쳐준 유일한 생존 수칙이 '화장실로의 도피'였다는 사실에 나는 숨이 막혔다. 아내의 그 처절하고도 서글픈 배려가, 그리고 엄마를 지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며 아빠를 기다렸을 아이의 공포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날 밤, 겨우 잠든 아이의 가방을 정리하다 떨어진 스케치북 한 권을 발견했다. 알록달록한 꽃과 나무 그림들 사이에 유독 검은색 크레파스로 덧칠해진 페이지가 있었다. 그 속에는 거대한 검은 그림자 같은 형체가 날카로운 손을 뻗어 아주 작은 아이를 내리치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림 속 아이의 눈은 눈물 대신 텅 빈 구멍으로 그려져 있었다.


내가 회사에서 일을 하고, 내가 '은신처'라고 믿으며 가꾸었던 이 집 안에서, 내가 없는 동안 아이가 홀로 견뎌낸 현실은 내가 보고 싶어 했던 '행복한 가족'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지옥이었다. 아내는 미안함 때문에 아이를 밀어냈고, 아이는 살기 위해 엄마를 거부하고 있었다.


무너진 엄마의 자리에서 아이는 그렇게 비명을 삼키며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차마 아내를 향해 왜 그랬냐고 소리칠 수도,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지독한 무력감 속에 주저앉아 밤새도록 오열했다. 우리가 쌓아 올린 공존의 성벽은, 정작 가장 소중한 아이의 영혼을 갉아먹으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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