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겨울 바다, 따뜻한 약속
그날 밤, 희옥은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눈이 와서였는지, 마음에 불이 들어와서였는지 모르겠다.
겨울바람에 목도리를 한 번 더 감고 나온 다음날.
약속 시간은 오전 10시.
요즘이야 늦잠 잘 시간일지 몰라도,
그 시절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엔
이른 아침도 늦은 거였다.
"여기요!"
멀리서 손을 흔드는 태산의 모습이 보였다.
겨울 길거리는 사람도 적고, 말도 조용했다.
희옥은 조심스레 다가가며 웃었다.
"춥지 않으셨어요?"
본인의 손은 연신 비비며 태산이 물었다.
"아뇨, 괜찮았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저도요."
둘은 조용히 버스를 타고,
바닷가에 자리한 칼국수집에 들어갔다.
창밖으론 잔잔한 파도가 밀려들었고
김을 피우는 조개칼국수 한 그릇이
둘 앞에 놓였다.
"드셔보세요. 여기 국물이 끝내줘요."
"정말요? 그럼 믿고 먹어볼게요."
호호 불며 국물을 떠먹는 희옥의 볼은
이미 차가운 바람에 발그레했다.
태산은 젓가락을 들다 말고 물을 챙겨주며 말했다.
"입술에 묻었어요."
순간, 희옥은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닦았다.
"어머, 민망하게..."
"괜찮아요. 저는 보기 좋던데요."
"에이, 왜 이러세요~"
서로 눈이 마주치자 웃음이 터지는 둘이었다.
사소한 것에 웃음이 터지는 그들이었다.
웃음이 끊이지 않던 칼국수집을 나와,
바닷가를 걷기 시작했다.
파도 소리는 생각보다 작고,
둘만의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눈이 다 녹지 않은 모래 위를
조심조심 걷는 둘의 발자국은
서로를 따라가기 바빴다.
그러다 갑자기 태산은 어딘가로 뛰어갔다.
무언가를 사고 있는 그는 금세 희옥에게 왔다.
"번데기 드셔보셨어요?"
작은 종이고깔에 들어있는 번데기.
"제가 별미 하나 사 왔습니다."
"번데기요? 오랜만이네요."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희옥은 이쑤시개 대신에 손으로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태산은 히죽히죽 웃어댔다.
"... 음 괜찮은데요?"
동그란 눈을 하고서는 엄지를 추켜세웠다.
"진짜요? 후회 안 하시죠?"
"음. 오늘 데이트요? 지금까진 합격이에요."
능청스러운 희옥의 말에 태산은 조금 놀란 듯 웃었다.
어디선가 포장마차에서 흘러나오는
통기타 노래 한 곡이 바람에 얹혀 둘의 주위를 맴돌았다.
희옥은 무심히 바다를 바라보다 말했다.
".... 다음에 또, 이런 날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다음도 오늘처럼 10시에 만나죠."
"약속이에요?"
"네. 그땐.. 아마 더 따뜻해져 있을 거예요 우리 둘 다."
집으로 돌아온 희옥은
조심스레 벗은 목도리에서 바닷바람 냄새를 느꼈다.
그러다 코트 주머니 속에서 기름 묻은 종이 고깔 하나가
구겨진 채 들어 있었다. 아까 먹던 번데기 종이와, 휴지장미 한 송이.
종이에는 누군가의 글씨가 삐뚤게 쓰여 있었다.
[번데기는 고소한데, 사람 마음은 쓰네요.
큰일 났네, 또 보고 싶어지려나 봐요.]
희옥은 웃음을 삼켰다.
너무 뻔하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말.
묘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녀는 무심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책상에 올려두었다.
바람은 여전히 찼지만,
창밖으로 내리는 눈은
오늘따라 따뜻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