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이녁, 그녁

ep.14 기다림의 시작

by 곰C


공장문이 닫히자 노동자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맞은편 식당 앞에서 배달 청년이

땀을 훔치며 그릇을 나르고 있었다.


전혀 다른 청년인데도,

희옥 눈에는 자꾸 희수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얼마 전 그 식당 앞에서 담배를 물고 있던

동생의 얼굴이 선명하게 스쳤다.


희옥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희옥은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왜 그래?"

태산이 눈치를 채고 물었다.


희옥은 시선을 피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좀 더 챙겼으면, 희수도 그렇게 되진 않았을까 싶어서."


태산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희옥의 손등을 조심스레 잡았다.

"옥아, 사람은 다 자기 갈길 가는 거야.

넌 이미 네 길도, 네 동생 길도 다 떠안고 살았잖아.

이제는 네 마음 좀 지켜라. 넌 항상 그 자리에 있었잖아.

그냥 다 자기의 길로 걸어갈 뿐이야."


희옥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봐준 적이 없었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애써 고개를 돌렸다.


태산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능청스럽게 말을 돌렸다.

"근데 있잖아, 나 나중에 군대 가면 어쩔래?"


"뭐?"


"왜 나 군대 갈 나이잖아~"


"뭐 글쎄..?"


"나 버리고 딴 남자랑 웃고 있으면 나 엉엉 울어버린다?"


"야! 남자가 무슨!"

희옥은 얼굴이 붉어져 팔꿈치로 그를 툭 치며 화난 척했다.

하지만 입가가 사르르 올라갔다.


그 얼굴을 본 태산은 크게 웃더니, 희옥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닫고 있다가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 옥아, 사실.... 입영통지서 왔다.."


희옥은 놀란 토끼눈을 하고선, 태산을 바라보았다.


"뭐? 한 달 후에 간다고?"


"응. 겁내지 마. 잠깐 다녀오는 거야.

그동안은 우리 매일보고, 맛있는 거 먹고,

웃으면서 시간 보내자. 그리고 나 돌아오면

우리 진짜 잘 살아보자."


분식집에선 떡볶이에 사이다 두 잔을 나눠 마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 맨 뒷좌석에선 태산이 귓가에 속삭였다.

"편지 안 쓰면 삐진다~"


"쳇 애도 아니고..."

눈물이 고여 말을 잇지 못한 희옥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쌀쌀한 공기에

괜히 뜨끈한 어묵국물이 생각났다.


둘은 말없이 포장마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 포장마차 안,

술잔을 기울이는 어른들 틈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어묵국물을 삼켰다.

희옥은 국물 한 모금을 삼키다,

짠맛에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났다.


계산을 마치고 천막 밖으로 나오자,

멀리서 개 짖는 소리와 라디오 잡음이

밤공기를 타고 흘러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그 소리를 묵묵히 들으며.


집 앞 골목에 다다르자, 태산이 희옥의 손을 꼭 잡았다.


"옥아, 희수는 언젠간 제자리를 찾을 거야.

넌 그때까지, 네 자리만 지켜.

내가 돌아오면... 우리 둘만의 자리 만들자."


희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꼭 감았다.

가슴이 저릿했지만, 울음을 끝내 삼켰다.

태산 앞에서만큼은 흐트러지고 싶지 않았다.


한 달 후, 태산은 강원도로 떠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능청을 떨었다.

"옥아, 편지 안 쓰면 삐친다? 군대 가서도 삐질 수 있다?"


"야, 누가 편지를 안 써!"


"그럼 하루에 두장씩 써. 안 그럼 탈영한다?"


희옥은 눈을 부릅뜨며 "미친놈"하고 욕을 내뱉었지만,

입술 끝은 떨리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곧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손을 흔드는 까까머리 태산의 모습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남은 건 기차 바퀴 굴러가는 쇳소리뿐이었다.


다시, 혼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아침이면 공장 미싱소리에 맞춰 몸을 움직였고,

저녁이면 희수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태산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 허전했지만,

희옥은 눈을 질끈 감고 버텼다.

그녀의 삶은 늘 그래왔다.

누군가 곁에 있어도,

결국 버티는 건 자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 라디오에서 낯익은 이름이 흘러나왔다.


"다음 사연은요~강원도 제0사단에서 온 군인아저씨

경태산 청취자님의 편지인데요?"


희옥의 손이 잠시 멈췄다.

라디오 속 목소리가 또렷하게 이어졌다.


"2:2:2 커피를 좋아하는 김희옥 씨에게.

요즘 공장일은 좀 덜 힘들어요?

여기 밥은 맛도 없고 잠은 짧아요.

그래도 힘든 군생활 속 옥이를 생각하며

버티고 있어요. 당신도 저를 생각하고 있나요?

옥이와 공장 앞 떡볶이에 사이다가 먹고 싶어요."


미싱이 덜컥, 천을 삼켰다.

희옥은 얼른 전원을 내리려다

그대로 멈춰 섰다.


DJ가 마지막 한 줄을 읽었다.


"사실 당신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이병 경태산. 어머~사랑의 러브레터였네요?

듣고 계시나요 2:2:2 커피를 사랑하는 희옥 씨?

국방의 의무를 하고 있는 태산 씨를 위해

신청하신 노래 한곡 띄어 드리겠습니다.

전영록의 불티."


나의 뜨거운 마음을

불같은 나의 마음을

다시 태울 수 없을까

헤어지기는 정말 싫어

이제라도 살며시

나를 두고 간다면

내 마음 너무나 아쉬워...


희옥은 태산과 영화를 보던 그때가 생각이 났다.

천위에 떨어진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한참을 고개를 숙이며 미싱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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