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터에서 채움의 시간을 만나다 -> 국립익산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을 보고 넘어온 다음 장소는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작품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제각각의 개성이 뚜렷했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 기념전이라는 설명이 없었다면
작품들의 정서를 관통하는 메인 테마를 단번에 알아채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작품에 붙은 파편들을 하나씩 맞추다 보면
그 당시의 감정을 오롯이 톺아보게 되었고 특히 회차당 관람 인원을 극소수로 제한한 덕분에
온전히 작품과 단둘이 마주 앉아 덤덤하게 대화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러한 고요함 덕분에 작품의 심연을 더 깊숙이 이해할 수 있었고
1, 2층의 무거운 공기를 3층에서 경쾌하고 자유롭게 환기해 주는 구성 또한 무척 매력적이었다.
미륵사지의 지평선이 주는 광활함과 군더더기 없는 모더니즘 박물관의 조화는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탁 트인 대지가 주는 압도적인 해방감 속에서 낮게 엎드린
박물관의 현대적인 선들은 과거와 현재를 매끄럽게 잇고 있었다.
옛 절터의 비어있는 공간이 주는 울림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박물관은 대지 아래로 겸허히 몸을 낮춘다.
비움의 역사와 채움의 현대가 만나는 지점에서 국립익산박물관만의 독특한 공기가 완성된다.
느지막한 오후에 도착한 이곳에서 후백제의 흥망성쇠가 담긴 이야기와
미륵사지 9층 석탑에 얽힌 역사를 잔잔한 목소리로 전해 들었다.
박물관 내부 전시를 관람하고 영화 <콜럼버스>의 두 주인공처럼 공간이 주는 언어에 깊이 침잠해 있느라
해가 자취를 감추는 줄도 저녁 끼니를 잊는 줄도 모른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이야기가 주는 울림이 노을이라는 색채를 입어 더욱 짙은 감동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