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진짜이유] 그건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일 뿐

네 탓이 아니야

by 글쓰는공여사

"엄마~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왜? 많이 아파?"
"응."

딸내미의 왼쪽 네 번째 발가락이 많이 부어있다. 어젯밤 소파에 찧었다 하더니.


진찰실에서 의사와 함께 X ray 사진을 들여다본다. 발가락이 똑 부러졌다.

"부러진 모양이 쉽게 붙질 않을 것 같네요. 수술로 침을 박아야 할 것 같은데…."


'조금 부었으면 약 먹으면 되겠지! 혹 부러졌다면 깁스하면 되겠지!' 딱 거기까지 밖에 시나리오를 안 써왔는데, 예상치 못한 '수술'이라는 단어의 출현에 마음이 훅 흔들린다. 속상하다. 미국과 유럽에는 시체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는 바이러스 사망자가 미래 재난 영화처럼 펼쳐지고 있는데, 난 딸내미 발가락 수술 소식이 더 심난하고 마음 아프다.


그러니까, 어젯밤 빨래를 걷었어야 했다. 빨래를 걷다 말고 피곤하니 내일 걷자,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어젯밤에 빨래 걷고 뺄래 대만 치웠더라면 이런 사달이 나진 않았을 텐데... 딸내미가 새벽에 불도 켜지 않고 화장실 가다, 빨래 대 피한다고 소파를 힘차게 걷어차고 만 거다.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아서.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아서. 삶의 변화를 이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번 흔들릴까 봐.


X ray실에서 뼈 상태를 보며 의사는 뼈를 맞추고, 딸내미는 내 손을 꼭 잡고 신음소리를 뱉는다. 20살이 다 된 아이가 아직도 내 뱃속에 있는 듯하다. 내가 마시는 공기로 숨을 쉬고, 내가 먹는 음식으로 자라는 것처럼, 딸내미의 고통이 오롯이 나에게 전달된다.


깁스를 하고, 3일 후에도 뼈가 붙을 조짐이 안 보이면 수술해야 한다고 의사는 담담하게 말한다.

1586307818320.jpg 우리 집에 등장한 생소한 목발

무섭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치고 아프고 병드는 게. 그걸 내가 옆에서 지켜보는 게. 매일 명상하고, 뇌 공부 인문학 공부한다고, 덜 마음이 아픈 것도 덜 불안한 것도, 덜 걱정되는 것도 아니다. 매번 속상하고 매번 마음이 아프다. 딸내미 발가락 부러진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이리 쉽게 흔들린다.


이런 일에 마음을 다잡으려면,

1. 독화살을 나에게 쏘진 말자.

내 마음은 예상치 못한 사건에 급하게 인과관계를 짜 맞추고, 스토리를 급조해낸다. '내가 빨래를 걷지 않아서 다친 거다.'라는 말로 나에게 죄책감을 선물한다.


내가 어젯밤에 빨래를 걷었더라면, 내가 그 버스를 타지 않았더라면, 내가 30분만 더 늦게 나갔더라면....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면, 씨실과 날실 오만가지 조합으로 생긴 일을 '나 때문에'라는 한마디로 자신에게 가차 없이 독화살을 날리고, 그 화살에 스스로 죽어간다.


누구 잘못도, 단 한 가지 원인으로 일어난 일은 없다는 걸 우린 모두 안다. 너무 마음이 괴로워 뭐라도 갖다 붙이고 싶을 뿐이다.

juan-gomez-OFYTDD0AGHE-unsplash.jpg 네 잘못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2. 그건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일 뿐임을 알자.

"좌뇌라는 해석장치는 판단을 통해 끊임없이 범주를 창조하고 이야기를 만든다. 그 사실을 자각하기만 해도,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에 심오한 변화를 가져온다. 당신 안에 일어나는 변화를 덜 심오하게 받아들이며, 분별하고 판단하는 일 자체가 점점 드물어진다. 그건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일 뿐임을 아는 것이다. "

-크리스 나이바우어 <자네, 좌뇌한테 속았네!>


3. 고정된 문제가 아니고 변하는 상황이다.

딸내미가 앞으로 넘어져 코가 깨질 수도, 뒤로 넘어져 머리가 깨질 수도 있었다. 발가락 부러져 몇 주 고생하면 된다. 그만하면 됐다. 고정된 문제를 끌어안고 해결 방법을 찾는 게 아니고, 변하는 상황을 '잘' 보고, '잘' 대응해 나가면 된다. 원칙과 틀을 가지고 내가 상상하는 모습을 억지로 고집하면 괴롭다. 파도가 왜 왔을까 괴로워말고, 파도에 올라타자.


"매일매일 벌어지는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수고스럽겠지만 그냥 받아들이세요. 날씨처럼요. 비 오고 바람 분다고 슬퍼하지 말고 해가 뜨겁다고 화내지 말고." - 재독화가 노은님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그러니까 '오늘 날씨는 비 조금 오고 바람 조금 붐.'이다.


아직도 빨래 대에 주렁주렁 걸려있는 수건이며, 양말, 속옷을 후다닥 걷어치우며, 미운 빨래 대를 거칠게 구석으로 밀어놓는다.

"이놈들만 어제 걷었어도..."

어느새 또 영악한 좌뇌는 나에게 독화살을 쏘며, 소설을 쓰고 앉아있다.


난 좌뇌로 소설도 쓰고, 정신 차려 현실도 살고...

그렇게 오늘도 삶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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