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진짜 이유] 니 아빠한텐
말하지 마

입막음 하지 마세요

by 글쓰는공여사

"니 아빠한텐 말하지 마!"

엄마는 백화점에서 15만 원짜리 아빠 바지를 사 가지고 와서는, 우리 입부터 막았다. 그리고 아빠에겐 지하상가에서 만 오천 원 줬다고 얘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빠에게 말하지 말아야 하는 목록이 어찌나 길어지던지, 모두 기억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10분이면 뽀록 날 얘기도, 영원히 입에 지퍼 달아야 할 사건도 생겼다. 무의식적으로 학습이 되었는지, 나도 어느새 남편 입을 막고 있다.

"남편! 아직 엄마 아빠한텐 말하지 마."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상대 입만 막으면 내 맘대로 된다고 생각할까 봐.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상대 입만 막으면 내 맘대로 된다고 생각할까 봐. 그렇게 하면 불편하고 힘든 상황 피해 갈 수 있다고 믿을까 봐.


누군가의 입단속을 하고 있는 사람은,

1. 상황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다는 오류에 빠진다.

누군가의 입만 막으면 자신이 원하는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안이하게 생각한다. 내 몸도 내 맘대로 못하는데, 상황을 통제한다고? 천만에 만만에 콩떡이다. '3초 후에 세포 분열 들어갑니다. 1, 2, 3' '10분 후에 갑상선 호르몬 분비 시작합니다.' 이렇게 내 몸, 내가 조절하고 있는 거 아니다.


2. 이후에 벌어질 갈등 상황이 싫고 두렵다.

갈등 상황을 마주하고 감당할 멘탈이 안되니 일단 입막음으로 실드를 친다.

james-pond-HUiSySuofY0-unsplash.jpg 일단 막고 보자!

3. 거짓말을 계속하게 된다.

'작년에 당신이 지하상가에서 사다준 바지 시원하고 좋던데 …. 그거 같은 것으로 하나 더 사다 줘."

지하상가 바지에 보내는 아빠의 무한한 신뢰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엄마는 오늘도 거금을 들고 백화점을 간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4. 상대가 진정으로 사람을,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상대는 정보를 걸러 듣게 되고, 사람이나 상황을 이해할 기회를 놓친다. 아빠는 자식들 얘기도 좋은 얘기만 엄마에게 골라 들으니 자식이 잘 큰다 편하게 생각했을 게다. 팩트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면, 진실로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를 맺긴 힘들다.


삶은 고통과 쾌락 사이를 흐르는 강물이다. 자꾸 누군가의 입을 막으면 찌꺼기가 늘러 붙어 강물의 흐름을 막는다. '그 얘기는 엄마한텐 하지 마.' '그 얘기는 큰 애한텐 하지 마.'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강물처럼 자연스레 삶이 흘러가려면,

1. 팩트는 팩트로 전달하고, 그 팩트에 대한 감정 처리는 상대의 몫이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를 생각하게. 그리고 과제를 분리하게.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 걸세.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아야 하네.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

malka-W4EUiwceZjs-unsplash.jpg 뭔 말을 하지 말라는 거지? 넌 알아들었어? 글쎄.

2. 내가 과잉보호하고 있는 그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선의 책 <당신은 옳다>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고1 아들을 사고로 잃고,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는 사랑하는 장손이 외국 유학을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가 너무 충격받고 상심할까 걱정이 되어서다. 2년 후 혼자 아버지를 찾아가 손자 일을 말하며 아이처럼 울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이미 당신도 알고 있었노라 대답했다. 그 사실을 알면 아들 마음에 짐이 될까 말도 못 하고 명절 때마다 모르는 척 지내느라 본인도 힘들었다고 함께 우셨다. 노인이지만 아버지는 톡 건드리면 깨져버리는 유리조각 같은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더 모진 세월을 버텨낸 생존자다.'


내가 입막음으로 과잉보호하려는 부모, 배우자, 자식, 친구, 동료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알아야 할 권리도, 이겨내야 할 책임도, 이겨낼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하루 종일 비가 온다. 100% 야외 배변을 하는 우리 집 댕댕이 까뭉이에게 우울한 소식을 전한다. 팩트는 팩트로.

"까뭉! 밖에 비 많이 와서 오늘 못 나간다."

"뭐? 뭐가 와서 산책을 못 간다고?"

까뭉이는 '오줌 마려운 강아지' 표정이 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나가자고 자꾸 목줄을 물어뜯는다.

미안! 팩트에 대한 감정 처리는 네 몫이라니까.

rhendi-rukmana-H0lTOg1t_0o-unsplash (1).jpg

뒷베란다에 쉬할 자리를 깔끔히 정리해두고도, 비가 언제 그치려나 계속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본다. 까뭉이는 18시간째 오줌을 참고 있는 중이다. 내가 과잉보호하고 있는 상대는 생각보다 강하다.


'얼마나 쉬가 마려울까? 에라 모르겠다!' 우리는 빗 속을 뚫고 밖으로 나간다. 까뭉이가 참았던 오줌을 콸콸 쏟아내는 동안, 우산 위로 비가 투드득 투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새벽에 이게 뭔 짓인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약한 쪽은 나인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불안의 진짜 이유] 어떻게 해야 박정희를 벗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