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소평가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30편 추천
"편성표! 아직도 편성표 보고 있는 거야?"
남편이 거실을 지나가다 날 보며 물었다.
"응."
"편성표는 제발 그만 보고, 그 시간에 그냥 아무거나 봐."
"어떻게 아무거나 봐? 시간 아깝게!"
난 시간 아깝다면서 TV 리모컨 버튼을 손가락 쥐 나도록 30분째 누르고 또 누른다.
우리 집에서 내 별명은 '편성표'다. TV 본다고 소파에 앉으면 30분이 지나도 여전히 편성표만 보고 있어서다. 그런 내가 넷플릭스를 보기 시작하면서 변했다. 붙박이 TV는 안 본다. 노트북 끌고 다니며 아무 때나 보는 디지털 유목민이 되었다. 버튼은 누르지 않고 대신 화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가끔씩 쓰다듬어주면, 최선을 다해 정제된 preview를 깔끔하게 보여준다. KBS, MBC, SBS 채널만 보고 자란 나에겐 상상하지 못한 신세계다. 가늘고 길게 살아남아 더 멋진 신세계를 맛보고 싶은 욕망이 조금 인다.
흰밥에 된장국과 김치만 먹다가, 반찬이 몇 개 더 늘어나더니 지금은 뷔페다. 뭐부터 먹을까, 뭐가 맛있을까, 마음이 설레고 담아갈 뱃속이 작은 게 한이다. 그래도 여전히 '편성표'란 딱지를 떼긴 어렵다. 이젠 '넷플릭스 영화 추천'을 인터넷으로 서칭 하느라 진짜 영화 볼 시간은 항상 부족하다. 그런 방황을 당분간 종식시켜줄 멋진 정보를 우연히 발견했다. '과소평가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30편'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눈이 맑아지고 30편 영화를 하나씩 찾아보고 싶은 의욕에 불탄다. 당분간 '편성표'라는 딱지는 떼어둘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netflix&wr_id=119541
30편 영화 중 첫 번째 나의 선택은 '밤에 당신의 영혼은(Our Souls at Night)'이다. 켄트 하루프의 소설을 영화화 작품이다. 공포, 스릴러 영화 아니다. 1936년, 1937년생 전설의 배우, 제인 폰다(Jane Fonda)와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의 주름진 얼굴을 보면 영화 장르를 바로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서 배우자를 잃고 오랫동안 혼자 살고 있는 외로운 애디와 루이스로 열연한다.
이런 분은 안 봐도 괜찮다.
1. 노인 얘기가 싫다면, 바로 PASS!
노화를 예방하는 알약이 나오지 않는 한, 우리는 모두 늙는다.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노인네, 노친네, 노땅 혹은 조금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어르신, 시니어, 실버 얘기다. 손가락 피부가 마르고 굳은살이 박여 스마트폰 '터치'가 잘 안 되는 바로 그런 세대, 그런 노인들이 주인공이다.
2. 진행이 느린 일상의 영화가 싫다면, 바로 PASS!
나의 일상도 힘든데, 뭔 다른 사람들의 현실적인 얘기까지 영화로 봐야 하냐? 그런 의문이 들면 바로 PASS!
70대~80대 할아버지 할머니 배우가 갱스터로 총질하기엔 기운 딸린다. 재난 영화에서 히어로 되기에도, 스릴러 공포 영화에서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기에도 역시 에너지 부족이다. 느리고 잔잔하게 행복하기에도 그들의 남은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1. 애디(제인 폰다)의 용기가 멋지다.
"난 외롭거든요. 괜찮으시면 언제 제 집에 오셔서 같이 주무실래요?"
"I'm lonely. Would you be interested in coming to my house sometime to sleep with me?"
영화는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사는 70대 할머니 애디(제인 폰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내를 잃고 외롭게 사는 할아버지 루이스(로버트 레드포드)에게 먼저 찾아가 말한다. 외롭다고, 혼자 보내는 끔찍한 밤을 함께 보내자고. 섹스 없이 함께 잠을 자자고. 어둠 속에서 대화하고, 함께 누워 밤이면 다가오는 외로움을 달래 보자고.
아무리 내가 배우자를 잃고 혼자 오래오래 외롭게 살고 있어도, 이웃집 혼자 사는 할아버지 집의 문을 두들기며 이렇게 말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70대에 그런 말을 먼저 꺼낼 수 있는 애디의 용기가 멋지고 부럽다.
2. 다른 사람의 시선을 벗어나 진정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당당함이 멋지다.
동네 사람들 수군대는 게 두려워 뒷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루이스에게 애디가 말한다.
" 다음엔 현관으로 들어오는 게 좋겠어요."
" 다른 사람들이 수군댈 텐데요?"
"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면서 평생 살았어요."
우리는 어쩌면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기대하는 걸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면서 지금도 이 소중한 내 인생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지도.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자크 라캉
내가 꿈꾸는 욕망도 사실은 타인의 욕망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우리의 욕망을 누르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영화에서 애디는 자신이 행복해지는 데 타인의 시선은 필요하지 않다는 당당함을 보여준다. 애디와 루이스는 뒷문에서 앞문으로, 본격적인 데이트를 하러 시내로, 자연으로 공간을 넓혀간다. 그들은 영화에서 쇠약해진 몸, 주름진 얼굴로 나이 듦의 외로움과 슬픔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평생 살아온 삶의 지혜를 넌지시 우리에게 건넨다. 노인 영화를 보면서 기운을 더 얻는다.
3.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함께 밤을 보내며, 둘은 지나온 인생 얘기를 한다. 배우자를 떠나보낸 상실감, 자식들에 대한 트라우마,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후회와 자책. 그들은 고해성사를 하듯 서로에게 매일 밤 살아온 인생 얘기를 풀어낸다.
"뭐든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일도 있어요. 자신을 용서할 줄도 알아야 해요."
애디는 지난 시간을 괴로워하는 루이스에게 자기 경험에서 나온 조언을 건넨다.
나이와 상관없이 조곤조곤 함께 얘기할 상대가 옆에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영화를 보고 나니 남편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나이 들면서 머리숱도 줄어들고, 잘 타던 자전거에서 넘어져 손바닥도 쓸려오고 갈비뼈도 금이 가고. 그래도 괜찮다. 늙고 힘없고 돈 없고 빽 없더라도, 오래오래 가늘고 길게 살면서 내 손을 잡아주고, 함께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밤에 우리 영혼은' 덜 외로울 게다. 내가 품고 있는 제일 큰 욕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