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진짜 하나 건졌다.
"진짜 하나 건졌다."
메뉴를 봤다고 음식을 먹은 게 아니고, 지도를 봤다고 그곳에 간 게 아니다. 넷플릭스 preview를 보고 또 봤다고, 그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게 아니다.
아직도 '편성표'라는 별명을 떼지 못한 내가 드디어 넷플릭스라는 망망대해에서 대어를 하나 건져 올렸다고 남편에게 자랑한다.
"뭔데?"
"넷플릭스 드라마인데, 내가 두 번이나 보다 말았거든. 근데 어제 새벽 끝까지 다 봤어. 중간에서 멈출 수가 없더라고."
"재밌었나 보네. 제목이 뭔데?"
"믿을 수 없는 이야기!"
비영리 언론매체 소속 기자들의 탐사보도 덕분에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An Unbelievable Story of Rape)’ 기사는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고, 2016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 실화 사건에 영감을 얻어 드라마가 제작되었다. 강간 피해자였지만 허위사실 유포로 기소된 한 소녀와 연쇄 강간범을 추적하는 두 여성 형사의 공조 수사 이야기다.
이런 분은 바로 PASS!
1. '강간'이라는 소재가 불편하다면
여자인 나도, 남자인 당신도 '강간'이란 소재가 편한 사람은 없다. 현실도 불편한 것 투성인데, 스트레스 풀려고 보는 영화마저 미간에 주름 만들어가며 봐야 한다고? 그런 마음이라면 오늘 이 드라마는 PASS!
2. 첫 1화의 고구마를 견딜 수 없다면
나도 두 번이나 첫 화를 넘기지 못하고 포기했었다. 1화 스토리가 고구마 열개 먹은 만큼 목이 막힌다. 위탁가정에서 독립한 18세 마리 애들러가 성폭행을 당한다. 그 상황을 경관들, 형사들, 병원과 경찰서에게 말하고 또 말한다. 공포와 충격, 피로에 싸여 마리의 혼란스러운 기억은 엇갈리고, 마리에게 의혹의 시선이 쌓이기 시작한다.
1화를 참고 넘겨야 목에 걸린 고구마를 해결할 사이다를 얻는다. 내 일상이 고구마 백개 먹은 것 같고, 지금 당장 사이다부터 마시지 않으면 질식사할 것 같으면, 오늘 이 드라마는 PASS!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드라마가 좋은 이유는,
1. '진정으로 듣고 배려한다'는 의미를 깨닫게 한다.
마리 애들러의 사건을 담당한 남성 형사들은 절차에 따라 형식적으로 업무를 수행한다. 사건을 빨리 종결시키고 싶은 성급함만을 보일 뿐 정작 피해자의 감정과 반응에는 관심이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2화에 등장하는 여성 형사 캐런 듀발이 새로운 피해자인 엠버와 나누는 대화는 놀랍다. 그녀는 '진정으로 듣고 섬세하게 배려한다.'
'내가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피해자는 힘든 일을 겪고 자책으로 괴로워하며, 일상적으로 하던 일들을 무의식적으로 해명한다. 이때 캐런 듀발 형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해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냥 알고 싶을 뿐이야."
듀발 형사는 피해자에게 시간을 주고, 다음 단계를 자세히 알려주고, 괜찮은지 매번 물어본다. 어떤 범죄 영화에서도 이렇게 섬세하게 피해자를 배려하는 형사를 본 적이 없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그제야 위안을 얻는다.
2. '용기'가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
삶을 허덕이며 살다 보면, '용기'가 뭔지, 언제 그걸 써먹어야 하는지, 나에게 그런 게 애초에 있었는지 우리는 잊고 산다.
이 드라마에서는 성폭행 피해자들이 자신의 신상과 치부가 드러날 위험을 감수하고 신고를 한다. 두 여성 형사는 증거 없는 사건들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파헤쳐 범인을 잡는다. 늘 거짓말만 하는 아이라고 손가락질받았던 마리 애들러는 두 형사가 범인을 잡았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전화를 건다. 모두 '용기'가 없었더라면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3. '미안하다. 고맙다'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한다.
7화에서 범인이 잡히지만, 정말 이 드라마가 하고 싶은 얘기는 8화에서 나온다. 피해자 마리 애들러는 자신을 허위진술로 몰아 법정에 서게 한 경찰에게 찾아가 '너무나 미안하다.'라는 사과를 받아낸다. 그리고 캐런 듀발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전한다. 사과해야 할 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고, 고마울 때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인생, 잘살고 있는 거다.
인간 때문에 살고 인간 때문에 죽는 우리가, 살면서 혹은 인생 마지막에 서로에게 진실로 해 줄 수 있는 말이 이 두 마디 말고 또 있을까?
'미안합니다.''고맙습니다.'
'미안하다.''고맙다.'
4. 팬심 생기는 두 여성 형사가 멋지다.
두 여성 형사의 Woman Bond가 멋지다. 따뜻하고 배려심 넘치지만 일에 있어서는 집요하고 냉정하며 완벽을 추구하는 멋진 인간들! 기프트콘이라도 쏴주고, 팬레터라도 보내고 싶다.
특히 캐런 듀발 형사가 부드럽게 조곤조곤 얘기하는 걸 듣고 있자면, 다음 생엔 여성 형사로 태어나고 싶다. 그 조곤조곤함은 피해자에게는 배려와 공감, 연대로 작용하고, 일처리에는 카리스마로 작용한다.
몇 시간째 사건 현장에서 증거 수집 중인 사람들이 안쓰러워, 경관이 듀발 형사에게 묻는다.
"저 친구들 좀 쉬어야겠어요. 화장실 좀 보내도 되겠죠? (How about we call a bathroom break?)"
"아니, 계속 수사하세요. (No, Keep Working)"
이 대사를 얼마나 낮고 부드럽게 말하는지…. 난 2화부터 듀발 형사의 팬이 되고 만다.
우리 집 댕댕이 까뭉이가 내 발 밑에서 코를 골고 자다가,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치켜뜨고 날 쳐다본다. 나도 부드럽고 조곤조곤하게 말해본다. 듀발 형사처럼.
"아니, 계속 잠 자세요.(No, Keep Sleeping)"
까뭉이가 내 부드러움 속에 카리스마를 알아차렸으려나. 모두가 잠든 이 새벽에 나 혼자 듀발 형사 빙의 놀이를 하고 있는 걸 보니, 참 대단한 드라마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