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읽어?"
침대에서 꼼짝 않고 노트북에 코 박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묻는다.
"허즈번드 시크릿(Husband's Secret)"
난 최대한 짧게 답하며 대화를 뚝 끊는다.
"재밌어?"
그래도 한마디라도 더 얘기하고 싶은 남편이 말을 보탠다.
"응."
새삼 소설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3주 만에 3권을 먹어치웠다. 물론 '책 먹는 여우'처럼 킁킁 냄새 맡고 쪽쪽 핥아보고, 소금과 후추 뿌려 잘근잘근 씹어먹진 않았다. 노트북에 코 박고, 손가락 열심히 비벼대며 페이지를 넘겼다.
'312호에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죽여 마땅한 사람들''돌이킬 수 있는' 3권의 소설을 깔끔하게 클리어하고 '허즈번드 시크릿' 탐식 중이다. 심리 추리 미스터리 SF 소설을 Yes24 북클럽과 시립도서관 전자책으로 읽는다.
'아~ 그래서, 그래서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데? 죽이는 거야? 죽는 거야? 발각되는 거야? 누가 범인이야?'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화장실까지 노트북을 끼고 들어가 판을 깐다. 노트북 무게 때문에 다리에 쥐가 나야 겨우 화장실을 나온다.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내가 지금 소설 읽고 있어도 되나? 불안의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내가 지금 소설 읽고 있어도 되나? 오직 재미만을 위해 내 시간을 이렇게 보내도 되나?
재밌으면 됐지, 뭘 더 바래?이렇게 '재밌는' 소설을 오랫동안 읽지 않았다.
1. 소설 읽을 시간이 없었다.
일 잘하려고 업무 관련 책도 읽고, 꿈 찾아 이루려고 자기 계발서도 읽었다. 남들에게 '나도 그 책 읽었다!' 언젠가 자랑하려고 '죄와 벌' '노인과 바다'도 찾아 읽고, 내 마음 다독거리며 살아야 하니까 에세이도 읽었다. 그러다 보니 소설 읽을 시간은 아무리 쥐어짜도 없었다.
2. 소설 읽는 시간이 아깝다.
"남편~ 난 소설 읽을 땐 재밌는데, 읽고 나면 왜 시간이 아깝다는 느낌이 들지?"
"시간이 아깝다고?"
"응. 쓸 데가 없는 것 같아서."
"뭘 꼭 어디에 쓰려고 그래? 그냥 순수하게 재밌으면 되지!"
"......"
살면서 '순수하게 재밌는 경험'이 별로 없으니, 대중 소설 몇 권 읽고 아까운 시간 타령이다.
종이책은 나름 쓸 데가 많다. 책장 채우는 전시용으로, 충분히 두꺼우면 베개로도 활용 가능하다. 키우는 댕댕이 오르내리는 계단 만들 때도, 먼지 구덩이 침대 밑을 막을 때도 유용하다. 가벼운 책은 들고 다니며 햇빛 가리개로도 쓰이고, 부드럽게 여러 번 비벼 화장실 비상사태를 해결할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책의 쓸모를 못 찾았다면, 미친 척 한 장씩 뜯어먹으며 '책 먹는 여우'에게 공감해보면 된다. 비밀 암호가 적힌 종이를 급히 삼켜본 경험이 있거나, A부터 Z까지 영어 단어를 모두 정복하고 말겠다 결심하고 사전 첫 페이지를 쭈욱 찢어 잘근잘근 씹어본 경험이 있다면 어렵지 않은 선택이다.
소금과 후추까지 뿌려먹으면 더 맛있지.
"우리는 더 많은 소설을 읽으며 더 많은 타인이 되어야 한다.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세상은 무수히 많은 주인공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하현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
'허즈번드 시크릿'을 모두 읽고, 새로운 소설을 읽는 나에게 남편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근데 허즈번드 시크릿이 뭐였어?"
"십 대에 자기가 사귀던 여자 친구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거."
"그렇군."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내 입에서는 이런 질문이 튀어나간다.
"남편! 그런데 당신은 뭐, 그런 허즈번드 시크릿 같은 거 없어?"
"?!?!?!"
다른 와이프랑 살았다면 결코 받아보지 못했을 황당한 질문 앞에 허즈번드는 말을 잊는다.
'으~~흠 평소 안 하던 그런 종류의 질문을 내뱉다니, 소설 때문에 내 뇌가 조금은 말랑말랑해졌나 보다. 역시 소설 읽는 것도 쓸. 모. 가. 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