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서러운

[불안의 진짜 이유] 목소리도 늙는다니...

by 글쓰는공여사

"저게... 저게 내 목소리라고?"

녹음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말한다.

"그래! 네 목소리 맞아."

함께 테이프를 듣던 남편이 나의 의심을 단칼에 잠재운다.

"목소리가 정말 다르지 않아?"

"진짜 그러네."

"......"


목소리가 바뀌었다.


10년 전 딸내미 영어 공부시킨다고 '삼성 미니 컴포넌트 오디오'를 구입했다. 테이프 데크가 2개, CD가 3개나 들어가고 라디오도 들을 수 있다. 아무리 뜯어봐도 '미니'는 아닌데, 이름은 미니가 맞다.


몇 년 동안 처박아두었다 처분하려고 거실 한가운데 데려다 놓았다. 작동을 체크하던 남편이 어디선가 주섬주섬 테이프를 들고 나와 튼다. 테이프라니.. 이제 테이프도, 그걸 돌리는 기기도 모두 골동품인 세상이다.

테이프가 돌아가는 골동품, 바로 이놈이다.

테이프에서 27년 전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결혼한 지 1년 갓 넘은 신혼이었다. 미국으로 먼저 떠난 사랑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애틋한 생일 축하 테이프다. 핸드폰도 없고 컴퓨터도 겨우 작동을 시작한 때라, 그런 게 선물이 되던 시절이었다.


"내가 그런 걸 녹음해서 보냈다고?"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얘기를 장장 한 시간 동안 간지럽게 해 놓고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이제 와서 발뺌을 한다. 뭔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지 나도 궁금하진 않다. 중요한 건 목소리다. 목소리, 내 목소리가 지금과는 너무 다르다. 나근나근 소곤소곤 훨씬 여성스럽고 다정하다. FM 라디오 '한밤의 음악편지' 사연이라도 읊는지...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 많이 변했다니. 불안의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 많이 변했다니. 내가 이렇게 많이 변해가는 걸 내가 모르고 있다니.


"네가 강의를 너무 많이 해서 성대를 혹사시켰나 보다."

자신의 변한 목소리에 충격받은 아내를 남편은 그렇게 위로한다. 그래도 뭔가 마음이 짠하고 안 좋다. 나이가 들어 목소리도 늙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목소리가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내보이고 싶었던 자아의 모습이 변한 건 아닐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날은 혼란스럽다. 가지고 있는 몇 개의 자아를 어떤 비율로 배합해 내놓을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현 <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


남편이라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27년 전, 나의 '자아 배합'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게다. 사랑에 빠져 깨를 서말씩 쏟아내던 자아가, 그런 사근사근 다정한 목소리를 변조해 낸 게 분명하다. '일상을 살아내는 자아' 90% 배합인 지금과는 많이 다른.


tom-morales-9zbTchzxGqM-unsplash.jpg 뭔 목소리가 변했다고 오두방정이야? 세상에 안 변하는 게 어딨다고...

목소리 노화를 막으려면 하루를 허밍으로 목소리 준비운동을 시키고, 상체 근육운동을 하란다. 그럼, 먼저 허밍부터 시작해보자.

"으흐흥 어흥어흥어흐~~~ 으흐흠 흐흥 흐흥 으흥~~~"

그런데 이게 무슨 멜로디지? 내 입에서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이 허밍은? 유튜브를 검색해본다.

'허걱! 나훈아의 '갈무리'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몰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서러운 마음 나도 몰라."

이 노래가 허밍으로 나오다니. 두 번째 충격이다. 입에서 자연스레 나훈아 노래가 나올 만큼 나이 먹진 않았는데. 역시 인간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다. 내 무의식에서는 이미 이런 공식이 도출된 게 분명하다.


목소리가 변했다 = 늙었다 = 서럽다


진짜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27년 전 목소리 한번 듣고 유리 멘털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은 '늙음'을 인정하기 싫은 나를 위해,

1. 일단 저놈의 '미니 컴포넌트'부터 빨리 눈앞에서 해치우자.

무료 드림으로 다시는 테이프를 재생하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고, 저 놈의 테이프는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할 깊은 곳에 처박아두자.

1593568466142.jpg 바닥에서 떨어져 본 적 없는 우리 집 바벨

2. 허밍도 하고 바벨도 들자.

영생을 꿈꾸는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하루 100알씩 11억 원어치의 영양제를 먹는다. 목소리 노화를 막기 위해 그런 극단적인 노력은 아니더라도 돈 안 드는 허밍이라도 꾸준히 하자. 나훈아 노래는 말고. 상체 근육 강화를 위해 구석에 처박아둔 바벨도 이참에 꺼내 오자.


시커멓고 무거운 바벨을 밝은 곳으로 끌고 나와, 바벨에 잔뜩 붙은 댕댕이 털을 털어내고 있자니 이런 의문이 든다. '그런데 바벨 들면서 허밍도 할 수 있나?'


난 아무래도 바벨도, 허밍도 다 마음에 안 드나 보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서러운'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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