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도 기획하고 앉아있다고?

너무 일을 많이 해서 생긴 후유증이야.

by 글쓰는공여사

"그러니까 저 빨간 얼굴은 누구냐고?"

어벤저스 마블 영화에 등장하는 빨간 얼굴을 보고, 내가 딸내미에게 묻는다.

"설명해줘도 몰라. 순서대로 봐야 해!"


2시간짜리 영화를 한 편 봤으면 보자마자 즉시 이해되고. 다 끝나면 딱 잊어버려야지.

뭔 영화를 시리즈로 만들고 또 만들어서,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순서대로 보질 않으면 이해가 안 된다니?????

이 빨간 얼굴 누구냐고?

딸내미는 해리포터와 셜록 홈즈에 이어 어벤저스 마블 광팬이다. 참 좋아하는 것도 많다. 그 덕분에 딸내미 고3 때도 재수할 때도 우리 가족은 마블 영화 개봉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영화관 나들이를 했다. 난 워낙 뒤죽박죽 봐서, 보고 나면 더 혼란스러웠다. 그냥 딸내미 좋아하는 모습 훔쳐보려고 졸래졸래 따라다녔다.


아이언맨, 헐크, 토르, 캡틴 아메리카, 앤트맨, 스파이더맨, 블랙 팬서, 캡틴 마블...... 참, 영웅도 많다.


딸내미는 영화가 시작되면 가슴이 쿵쾅거린단다. 뭔 잘 생기고 팔다리 길쭉길쭉한 멋진 남자사람 보고 그런다면 이해나 가겠다. 망치 들고 설치고, 거미줄 만들고, 그린으로 변하면서 옷 찢어지고, 방패 들고 뛰어다니고, 철 뒤집어쓰고 날아다니는 그런 넘들 보면서 심쿵이라니. 시작부터 할 말이 없다.


보면서 감동에 쩔어 눈물까지 찍어낸다. 진짜다. 마지막 보너스 쿠기 영상 본다고, 그 긴 엔딩 크레딧 다 보고 앉아있다. 청소 알바생 자리 비켜줘야 하는데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우리가 손 잡고 끌어야 집에 간다. 광팬 분명하다.


이쯤 되면 마블 영화에 나오는 넘들은 다 부럽다.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에게 그리 사랑을 받으니.

딸내미 사랑을 듬뿍 받는 영웅들

처음엔 나도 딸내미가 좋아한다니 관심 있는 척 따라다녔다.

"근데, 땰냄! 헐크 빤스는 왜 안 찢어지냐?"

"......"

처음엔 엉뚱한 소리로 흐름이나 끊고 그랬다.


'어벤저스' 스무 번도 더 봤는데, 스토리는 모른다. 왜냐고? 시작하고 20분을 넘으면 어느새 까무룩 자고 있다.


그런데 처음엔 흉하다 자꾸 보면 정든다는 에펠탑 효과가 생겼던지 슬슬 재밌어졌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 읊고, 식당개 삼 년이면 라면 끓인다더니, 마블 광팬 딸내미 십 년 키우니 나도 뭔가 보인다. 하도 재밌다 세뇌당하고, 보고 또 보고 복습을 거듭했더니.


남편과 치킨 먹을 때 '자기 보고 싶은 거 봐!' 했더니. '정말?' 그러더니 CNBC 미국 경제뉴스 전문 방송을 영어로 내내 틀어놓고 치킨 뜯는다. 딸내미와 치킨 먹을 때 '너 보고 싶은 거 봐!' 했더니, '정말?' 그러더니 마블 영화를 무한정 복습한다. 난 정말 치킨 혼자 먹고 싶다.

난 치킨 혼자 먹고 싶다.

이런저런 이유가 붙어, 이젠 잠 안 자고 눈뜨고 끝까지 어벤저스를 본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남편도 딸내미도 신기해한다.


캐릭터가 하나하나 보이니 재밌다. 시니컬한 바람둥이에 천재 부자인 아이언맨도 멋있고, '아임 그루트'라는 말을 무한 반복하는 나무탱이도 귀엽다. 헐크가 악당 들어 올려 바닥에 쾅쾅 패대기치는 걸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 쫘악 풀린다.


마블 시리즈 나온 순서도 인터넷 찾아 공부했다. 정주행 3개월 계획표도 짜고, 딸내미에게 관전 포인트도 물어 정리해뒀다. 드디어 마블 영화 22개 순서대로 몰아보기에 돌입했다. 차근차근 시간 날 때마다 본다.


책도 기획해서 읽으면 더 재밌다. 궁금한 분야 책 3권을 먼저 읽고, 추가로 5권~7권 정도 더 읽는다. 1년 정도 꾸준히 읽고 있는 분야는 '뇌'관련 책들이다. 나의 뇌에 영향 줄만큼 멋진 책도 건졌다.

책도 기획해서 읽으면 새롭다.

팟캐스트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정주행 한다.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듣는다. 아주 집중해서 듣지 않아도 좋고, 나중에 한 번 더 듣고 싶은 회차를 메모해두었다 다시 들어봐도 좋다.


취미를 기획하니 뭐할까 뭐 볼까 뭐 들을까 고민 안 하니 시간 낭비가 없다. 연달아보니 전체 흐름이 보이고, 이해에 깊이가 생긴다.


"뭔 취미까지 기획을 하냐? 일이냐? 그냥 재밌는 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재미없으면 하다 떤져버려~~~ 정말 놀 줄을 몰라 놀 줄을."


남편의 핀잔을 들으니 그 말도 맞다. 그동안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생긴 후유증 아닐까 의심이 간다.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취미도 기획하고 앉아있다니.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취미도 기획하고 앉아있다니. 병에 걸린 거야. 못 놀아서.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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