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꼬리 뗄까? 말까?

콩나물 꼬리를 다듬으며 든 생각

by 글쓰는공여사

"에고! 저녁 늦었다!"

혼자 컴퓨터 앞에서 꼼지락거리다, 저녁 준비 시간을 놓쳤다. 냉장고를 후딱 열어보고 메뉴도 후딱 정한다.


오늘 저녁은 콩나물 국.


어제 사다 놓은 콩나물 봉지를 털어 상태를 살핀다. 꼬리가 길다. 시간도 없는데...

그냥 대강 눈에 띈 것만 골라 꼬리를 떼자! 옆에 다시마와 멸치를 넣은 물이 펄펄 끓으며 빨리 콩나물 넣어달라 보글거린다.


마음이 급해진다.


그런데 대강 몇 가닥 긴 꼬리만 떼려는 결심은 금방 무너진다. 자꾸 긴 게 눈에 밟힌다. 이것도 길고 저것도 길다. 여기까지만 따자. 아니 저거 저거 몇 개만 더 떼자. 이제 냄비 물은 끓다 못해 쫄아들고 있다.


그래도 콩나물 꼬리를 깔끔하게 다듬으려는 내 집착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다 떼자!


"아니, 분명히 꼬리가 짧다고 해서 샀는데..."

포장지를 살펴보니 내가 산 건 '꼬리가 짧은 콩나물'이 아니다. '키가 작은 콩나물'이다. 꼬리가 짧은 거야 장점이 되겠지만, 키 작은 게 무슨 장점이라고?!?!?!

그냥 따지마~ 뭐 귀찮게 그런 걸 떼고 그래?

남편이 지나가다 궁금해서 묻는다.

"뭐하게 귀찮게 꼬리를 떼고 있어?"

"글쎄......"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콩나물 꼬리 빨리 다 떼야하는데.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콩나물 꼬리 빨리 다 떼야하는데. 근데 이유도 모르면서 왜 내가 이러고 있지?


난 왜 콩나물 꼬리를 떼고 있을까? 장하다! 반 백 년 만에 왜 내가 그 일을 하는지 궁금해지다니...


1. 보기 싫으니까

노란 콩 머리와 기다란 줄기와 가느다란 뿌리. 흠... 조화롭다. 보기 싫지 않은데...

2. 목구멍에 걸릴까 봐.

콩나물 한가닥을 젓가락으로 반듯하게 집어 꼿꼿하게 편 다음, 목구멍에 집어넣지는 않을 테니, 그 이유는 아니다.

3. 목에 넘길 때 머리카락 넘어가는 것 같으니까.

질긴 식감 느낄 만큼 예민하지는 않다.

4. 콩나물 약 치면 꼬리에 다 모여 있을까 봐.

그게 걱정되면 아예 콩나물을 안 먹는 게 낫지 않을까?

5. 엄마가 매번 그랬으니까.

공부하라고 집안일은 전혀 시키지 않았던 엄마도 나에게 가끔은 콩나물 꼬리를 따달라 하셨다. 준비할 것은 많고, 차분히 앉아서 콩나물 꼬리 뗄 시간은 없으셔서 그랬을 거다. 그래서, 난 콩나물 꼬리는 당연히 떼고 먹는 줄 알았다. 그저 모두가 해왔고 하고 있으니, 이유도 모른 채 의심도 하지 않고 그렇게 했다.

뿌리에 숙취 해소 성분이 다 있다 하네... 헐.

그런데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고 내린 나만의 이유는,


난 콩나물 꼬리 떼는 시간이 좋다.

옆에서 급하게 졸라대는 물 끓는 냄비만 없다면.


신문지를 넓게 펴서 한쪽에 콩나물을 쏟아놓는다.

한 손에 콩나물 한가닥씩 천천히 들어 올린 다음, 다른 손으로 꼬리를 똑 뗀다.

미용을 마친 놈들만 신문지 다른 쪽으로 옮겨놓는다.


난 이런 단순한 행위가 좋다.


그걸 할 땐 아무 생각이 안 난다. 딸내미에게 더 잘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의 후회나 자책도 없다. 지금만큼 살지 못하면 어쩌나? 더 잘 살지 못하면 어쩌나? 병들면 어쩌나? 혼자 남겨지면 어쩌나? 그런 두려움도 불안도 없다.

그냥 콩나물 꼬리만 뗀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주인공 찬실이와 함께 열심히 콩나물을 다듬으며, 주인집 할머니가 말한다.


할머니: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 대신 애써서 해.

찬실: 그러면 오늘 하고 싶었던 건 콩나물 다듬는 거였겠네요.

할머니: 알면 됐어.(웃음)


밥 먹을 때는 밥 숟가락 뜨는 일이,

설거지할 때는 설거지하는 일이,

똥 눌 때는 똥 누는 일이,

콩나물 꼬리 뗄 때는 콩나물 꼬리 떼는 일이,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그 순간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미 지나간 과거 곱씹어 자책하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 걱정하며 불안해하는 것보다, 지금 여기서 내 모습 있는 그대로 그 순간 애써서 살면 그것도 괜찮은 삶 아닐까?


콩나물 꼬리 다듬으며 개똥철학 씨부렁거린다.

까뭉아! 네 똥 얘기 아니니까, 넌 하던 거 마저 하고...


에고. 나는 콩나물 꼬리나 떼야겠다.

애. 써. 서.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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