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에어비앤비가 집처럼 편해지는 순간

가장 무거운 놈, 가장 무가치한 놈부터 처치하기

by 글쓰는공여사

아에로부스 공항버스를 타고 카탈루냐 광장에 도착했다. 뜨거운 햇볕이 머리에 내려쬐고, 후끈한 더위가 도로에서 올라온다. 사방에서 뿜어내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낯설다. 들을 수는 있는데 한 마디도 이해가 안 되는 스페인어는 이제 시끄러운 소음으로 다가온다.


백화점과 쇼핑몰로 둘러싸인 광장에는 배낭족 천지다.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에 선글라스와 반바지, 슬리퍼 차림으로 손에는 생수병을 들고, 등에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거리를 활보한다.


보다폰 매장에서 구입한 유심칩을 딸내미 핸드폰에 꽂고, 숙소 주인장 마르셀과 자우메 역에서 만날 약속을 한다.


바르셀로나 지하철에는 유난히 계단이 많다. 아무리 둘러봐도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도 없다. 우리는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른다. 캐리어를 여기저기 긁혀가며 겨우 올리고 나면, ‘나 잡아봐라’하며 다닥다닥 뒤에 있던 계단들이 새롭게 앞에 생기고 또 생겼다.


영어에 ‘제티슨 jettison’이라는 단어가 있다.

jettison: 바다에 내던지다. 투하하다.


배가 바다에서 난파 위기를 맞으면, 선장은 배의 무게를 줄이고 속도를 높이기 위해, 가장 무거운 것, 가장 무가치한 것부터 바다에 내동댕이친다는 의미다. 우리도 아무래도 가장 무거운 놈, 가장 무가치한 놈부터 골라 ‘제티슨’ 해야 할 위기다. 버리자, 버려야 산다.

캐리어를 가득 채운 밥솥과 한식재료들

‘어떤 놈부터 해치울까?’ 나의 뇌는 캐리어 투시도를 연결하고, 내용물을 뒤적인다. 라면 열다섯 봉지, 미쳤다! 마트 가서 사 먹으면 되는데, 이걸 내가 왜 싸 짊어지고 왔지? 볶은 김치 열세 봉지. 많이도 싸 왔다. 김치 못 먹어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깻잎 깡통, 얼큰 부대찌개 양념도 뒤적이다가, 앗! 지금 잡히면 죽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숨죽이며 쳐 박혀 있는 놈을 발견한다.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17.5센티미터, 무게 1.68킬로그램, 이름은 ‘1인용 미니 밥솥’. 가장 무거운 놈, 가장 무가치한 놈 ‘제티슨’ 1순위에 오른다.


“딸냄~ 우리 밥솥 버리고 갈까?”

“버린다고? 뭘 여기까지 가져와서 그걸 버린다고 그래? 한 번도 안 써보고.”

“그래도 캐리어 너무 무겁잖아.”

“엄마 너무 무거워? 내 거랑 바꿔들까?”

“아니. 엄마는 들 수 있어. 네가 무거울까 봐 그렇지.”

“난 괜찮으니까, 엄마나 잘 따라와.”


제티슨 1순위 미니 밥솥은 딸내미의 단호한 일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그래도 야리야리한 딸내미가 힘겹게 헉헉거리며 캐리어를 옮기는데, 지나가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아무래도 ‘각자도생’ 제각기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인가 보다. 우리도 알아서 남은 힘을 긁어모아 자력으로 드디어 평지에 도달한다.


자우메 역에서 숙소 주인장 마르셀을 만났다. 눈빛이 따뜻한 갈색머리의 여자다.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와서, 캐리어를 계단에 올리고 내리느라 힘들었던지 처음 만난 마르셀과 뭔 말이라도 길게 하고 싶어 진다. 마르셀은 딸내미의 18킬로그램 캐리어를 번쩍 들어, 좁고 어두운 계단을 지나 아파트 안까지 들어 올려 준다. 친절하고 힘까지 센 마르셀과 오랫동안 친구 하고 싶다.


에어비앤비 숙소는 원룸에 화장실만 분리되어 있었는데, 에어컨도 씽씽 잘 돌아가고 와이파이도 빵빵 잘 터졌다. 무엇보다 지하철과 가까웠다. 마르셀은 식기세척기와 세탁기 사용법, 에어컨에서 나오는 물을 하루에 한 번씩 꼭 버려달라는 주의사항, 문단속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소파를 침대로 바꿔주고 여분의 이불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숙소 앞 마트에서 쌀을 사서, 지하철에 내동댕이쳐 버릴 뻔한 미니 밥솥을 꺼내 처음으로 고슬고슬하게 밥을 지어먹고, 잠에 빠져들었다.

_7171344.JPG 바르셀로나 에어비앤비 아파트


숙소는 고딕보른지구의 경계에 있었다.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새벽까지 술 마시며 즐겁게 노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숙소를 예약할 때 금요일 밤에는 조금 시끄럽다 해서, 예약을 할까 말까 망설였더니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다른 나라 갔으니, 그 나라 사람들이 사는 소리가 밤에 좀 들리면 어때? 그런 소리 들어보려고 그 나라 사람들 사는 아파트 빌려서 가는 거잖아. 그럼 그들 속에 사는 것처럼 지내다 와.”

현명한 남편은 꼭 내가 반박하지 못할 말만 골라서 한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내 침대가 집 앞 놀이터 한가운데 놓여있는 것 같았다. 방음이 전혀 안 되는 창문을 통해 외계인들의 대화가 내 귀에 쏟아져 들어왔다. 밤새 잠을 잤는지, 놀이터에서 바르셀로나 사람들과 함께 놀았는지 비몽사몽 헤매다가 아침을 맞았다.


웅성웅성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베란다 문을 열어보니, 부지런한 아침형 인간들이 주황색으로 칠해진 똑같은 자전거를 끌고, 투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놀이터에서 투어가 시작되나 보다.

동네 앞 놀이터에서 바르셀로나 자전거 투어가 시작되었다

혹시 딸내미도 밤새 잠을 설치지 않았나 싶어 물어봤다.

“딸냄! 어젯밤 너무 시끄럽지 않았어?”

“아니, 뭔 소리가 났어?”

여행 중 딸내미는 침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기절이다. 아무 소리도 못 듣고 잠에 빠졌다 깨어난다.


6박 7일 동안 동네 놀이터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자나 걱정했는데 생존 본능 강한 우리는 적응도 빠르다. 시끄러운 소리도 사람 사는 소리로 들리고, 어느 때는 뭔 소리 하는지 알아들은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언어에 대한 놀라운 적응력이다.


단독으로 사용하는 아파트에서, 마음대로 자고 먹고 뒹굴고 나갔다 들어오고 샤워하고 화장실 가고 밥 해 먹으며 지냈다.


에어비앤비 숙소가 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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