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는 쓰레기통에
타고 있던 버스가 런던 증권가를 지나간다. 퇴근 무렵인지 사무실에서 쏟아져 나온, 와이셔츠 정장 차림의 한 무더기 젊은 남자들이 거리를 채운다. 양복이 서양인들의 옷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의 어깨라인이 멋지게 살아있다.
그들이 오늘 숫자와 씨름하느라, 얼마나 스트레스받고 힘들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 눈에 그들은 런웨이를 활보하는 패션모델들이다. 몸에 꼭 맞는 와이셔츠 라인에 입이 벌어지고, 심장은 콩을 튀긴다.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에 딸내미를 부른다.
“딸냄. 저기 저것 좀 봐.”
고개를 쑤욱 내밀며 창밖을 살피던 딸내미가 말했다.
“뭐? 뭐? 엄마, 뭘 보라고?”
딸내미 눈에는 런던 남자들의 와이셔츠 라인도, 런웨이 쇼도 보이지 않는다.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들만 보인다.
버스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 런던에는 출퇴근 교통 체증도 없는지, 신호등 하나 걸리지 않고 버스는 내달린다. 구경 좀 하자. 딸내미에게 버스에서 잠깐 내리자 할까? 그런데 뭐라 하지? ‘엄마도 여행 왔으니 눈 좀 정화시키자.’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까? 아니면 ‘눈앞의 아름다움을 외면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돌려 말하면 알아들을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버스는 그들을 지나쳐 간다. 런웨이를 걷는 섹시한 흰 와이셔츠의 런던 멋쟁이들도, 골목에 서서 맥주를 마시는 런던 훈남들도.
“엄마, 배고파.”
아직도 패션쇼 분위기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몽롱한 상태로 길을 걷는 나에게, 딸내미가 찬물을 확 끼얹는다. 그렇지, 참, 난 배고픈 딸내미와 여행하는 엄마지.
런던 물가가 비싸고 먹을 것 없다고 요 며칠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워서인지, 딸내미 배는 자주 고프다. 마트에 들러 숙소에 들고 갈 플레인 요구르트, 사과, 복숭아, 쿠키 등을 잔뜩 비닐봉지에 담았다. 봉지에 담긴 것으로는 저녁 식사가 안 되니, 푸짐하고 맛있는 ‘와사비’ 가게의 초밥이 또 생각난다.
무거운 비닐봉지를 들고 다리를 넘고, 대성당을 지나 걷고 또 걸어 ‘와사비’ 가게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게 안이 캄캄하다. 유리문 가까이에 얼굴을 대고 안을 들여다보며 딸내미가 말했다.
“엄마! 문 닫았나 봐.”
시계를 보니 문 닫는 시간 8시를 3분 넘겼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딸내미는 초밥 없이 라면으로 저녁을 때울 생각에 의기소침하다.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십 대다.
다행히 맞은편에 불을 훤히 밝힌 일식 체인점 ‘잇수 Itsu’가 눈에 들어온다. 와사비든 잇수든 상관없다. 맛있고 푸짐한 초밥만 살 수 있다면. 가게 안은 깔끔하고 차분하다. 여유롭게 먹고 갈 수 있는 좌석도 보이고, 냉장고에는 아직은 남아있는 먹음직스러운 초밥세트도 보인다. 서둘러 초밥을 고르고 계산대에 가져갔다.
와사비 가게 찾느라 에너지는 바닥인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계산대에 내 마음과 눈을 훈훈하게 해주는 잘 생긴 훈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훈남과 ‘사적인 대화’를 시작하며 말을 섞는다.
“이거 주세요. 얼마예요?”
“네. 7.99 파운드입니다.”
철푸덕.
우리의 ‘사적인 대화’의 흐름을 딱 끊는 소음이다. 뭔가 바닥에 퍼질러 떨어지는 소리인데 뒤돌아보니, 커다란 플레인 요구르트 뚜껑이 열려 바닥에 나뒹굴고, 걸쭉한 흰 요구르트가 페인트처럼 바닥에 쫙 뿌려져 있다. 그 앞에 딸내미는 어쩔 줄 몰라하며, 부동의 자세로 서있다. 축 늘어진 어설픈 비닐봉지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터진 것이다.
훈남이 부리나케 계산대를 넘어, 어려움에 처한 딸내미를 구하러 쏜살같이 달려간다. 괜찮다고 딸내미를 안심시키고, 엎드려 바닥의 요구르트를 닦는다. 휴지 몇 장으로는 역부족이다. 훈남 손에는 이미 요구르트 범벅이다. 그 통 안에 그렇게 많은 요구르트가 들어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잘 생긴 훈남의 영국식 발음을 우아하게 들으며, 상큼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던 애초의 의도와 달리, 훈남을 땅바닥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 이럴 땐 훈남 손에 빳빳한 지폐를 팁으로 건네줬어야 하는데….
‘팁은 굳이 안 줘도 되는 돈이야’라는 좀생이 마인드로 굳어진 나의 뇌에서 ‘남자가 바닥에 무릎 꿇을 땐 = 팁’이라는 공식을 새롭게 도출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나는 이제 겨우 여행 6일 차 새내기란 말이야.
땡큐 소우 머치를 허공에 여러 번 외치고 나가려는데, 딸내미가 요구르트 잔뜩 묻은 휴지를 나에게 내민다. 쓰레기통을 못 찾은 거다. 더러운 휴지마저 탁자 위에 남겨두고 가긴 미안해서, 딸내미가 건넨 휴지를 들고 훈남에게 물어본다.
“Where is the waste box?"
그 흔한 ‘trash can’이라는 단어는 왜 생각이 안 나는 거지?
런던 훈남, 그 순간 나를 향해 하얀 손바닥을 내밀었다. 앗! 손바닥이다.
우리의 기억은 맥락과 빈도와 최근도의 함수다. -개리 마커스
그의 손바닥을 본 순간, 나의 뇌는 이틀 전 나를 안내하느라 내밀었던 흑인 손바닥을 기억했다. 악수하자는 줄 알고 덥석 잡고 흔들었던 그 손바닥을.
이번엔 뭐지? 악수는 분명 아니고, 손을 내밀었으니…. 뭘 달라는 얘기겠지. 난 그 허전한 손바닥 위에 요구르트 묻은 휴지를 가볍게 올려놓고, 땡큐 소우 머치를 또 외치며 뒤돌아 나왔다.
훈남이 뒤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Over there. Ok….”
가게를 나오려는 순간, 옆에 따라 나오던 딸내미가 문 옆의 커다란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엄마, 저기 쓰레기통 있는데….”
오~마이~갓!!!
그 쓰레기통을 본 순간, 훈남이 내민 손바닥의 방향과 쓰레기통의 위치가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내가 쓰레기통이 어디 있는지 물었고, 훈남은 손짓으로 답을 한 것뿐인데…. 그• 손•바•닥•위•에• 쓰•레•기•를...... 훈남은 아시안 모녀와의 소통을 포기하고 ‘Ok….’로 황당한 마음을 정리하였던 거구나.
잘 생긴 훈남을 바닥에 무릎 꿇리는 것도 모자라, 손바닥에 지저분한 휴지까지 탁 얹어주고 나온 나를 나도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 ‘내민 손 덥석 잡기 전에 생각 먼저 하기!’ 교훈을 얻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까맣든 하얗든 내민 손을 조심했어야지. 그 손에 쓰레기 투척이라니…. 할 말이 없다.
신혼 때 미국에 먼저 가있는 남편과 합류하러 혼자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가 너무 흔들려, 옆 좌석에 앉았던 생면부지 백인 남자의 하얀 손을 덥석 잡고 오랫동안 안 놓아주었던 기억까지 하면, 손에 관한 몹쓸 추억들이 평생 트라우마로 번질 기미를 보인다.
눈치 없고 상황 판단 못하는 나의 만행으로, 런던 훈남은 손바닥에 요구르트 묻은 휴지를 들고 어안이 벙벙했겠지만, 우리는 숙소 올 때까지 배를 쥐어 잡고 웃고 또 웃었다.
‘Sorry Guy! I didn’t mean to hurt you.‘
미안해 훈남. 네 맘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쓰레기통 영어 단어는 생각도 안 나더니, 이 표현은 기억 속에서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진심이라 그런가?
숙소에 들어와 초밥과 라면을 맛있게 먹고, 또 이도 안 닦고 세수도 안 하고 입안에 달달한 쿠키를 가득 담고 기절했다. 런던에 와서 밤마다 기절하고 다음날 의식을 회복하는 엄마와 딸. 하루에도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종일 재잘거리고 종일 길을 잃는다.
이제는 ‘런던’과 ‘요구르트’, 이 두 단어만으로도 웃음이 삐져나오는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추억까지 생겼다. 우리 마음거리는 런던 훈남의 의도치 않은 희생으로 5센티미터 더 가까워졌다. 그래도 런던 훈남이 손바닥 위에 내가 떨구고 간 휴지를 받아 들고 지었을 표정을 생각하면….
여행 초반에 쥐구멍 여러 번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