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르셀로나] 스페인에
왔으니 우리도 시에스타

깨어있을 때 꿈을 꾸죠

by 글쓰는공여사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른다고 스페인에 와서는 스페인 법을 충실히 따랐다. 코피 사건 이후로 우리는 아침마다 늦잠을 자고 이른 점심을 먹으러 잠깐 외출을 했다. 그러다 햇빛이 뜨거워질 기미를 보이면, 햇빛보고 먼지처럼 바스러지는 드라큘라라도 되는 듯 숙소로 급히 도망쳐 왔다. 그리고 달콤한 낮잠, 시에스타를 한껏 즐겼다.


침대에 올라간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뭘 얘기하다 조용해서 뒤 돌아보면 딸내미는 벌써 자고 있다. 긴 팔다리를 침대에 늘어뜨리고 입을 벌리고 빛의 속도로 잠에 빠져든다. 수면 on-off 기능을 탑재한 로봇 같다.


숙소가 시원하긴 해도 지린내 나는 골목길을 지나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야 하고, 매일 에어컨 물 떨어진 양동이도 비워야 하고, 놀이터 소음도 만만치 않은데 딸내미는 다 좋단다. 에어컨 시원하지 해야 할 공부 없지, 침대에 벌렁 누워 동네 빵집에서 사 온 달콤한 크림빵을 먹으며 핸드폰을 하면...... 이런 천국이 따로 없다는 표정이다. 까다로운 어른보다 아이를 만족시키기는 훨씬 쉽다.

_7181556.JPG 숙소가 제일 좋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다. 한번 쉬러 들어오면 침대와 합체된 딸내미의 몸을 분리시키기가 어찌나 힘이 드는지, 찐한 잔소리를 퍼부어야 마지못해 주섬주섬 바지를 끼워 입는다.


‘유명 관광지를 꼭 다 돌아봐야 하는 건 아니잖아. 숙소 편하면, 숙소에서 좋은 시간 보내면 되지.’하는 쿨한 엄마 코스프레를 잠깐 했다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얼른 벌떡 일어나 준비 안 할래?’ 소리를 버럭 지른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을 함께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이성적인 엄마와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엄마가 미친 듯이 널뛰기를 할 리가 없잖아. 딸내미가 보기에도 참 혼란스럽겠다.


“나는 잠을 잘 때 꿈을 꾸지 않아요. 깨어있을 때 꿈을 꾸죠.”

-안토니 가우디


평생을 외롭게 살다 초라한 행색으로 전차에 치어 죽은 안토니 가우디. 그가 설계한 5층 주택, 까사 바트요 내부를 관람했다.


건물 외벽은 용의 비늘처럼 코발트 색유리로 반짝이고, 해골과 뼈를 연상시키는 발코니는 파도처럼 출렁인다. 안에 들어오니 깊은 바닷속에 들어온 것처럼 계단마다 햇빛은 아른거리고, 곡선은 부드럽고 색감은 강렬하다. 나는 분명 깨어있는데 가우디처럼 꿈속을 헤매는 듯하다. 가우디 워킹투어에서 만나지 못했던 가우디를 이제야 만난다. 천천히 느긋하게 그리고 충분히 게으르게.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 건축물 못지않게 골목을 둘러보는 재미도 크다. 단층 건물들 사이의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처음에는 퀴퀴한 지린내에 숨을 참게 되고, 굴러다니는 쓰레기에 눈길을 찌푸리지만, 그게 익숙해지면 사람 사는 모습도 독특한 가게도 눈에 들어온다.


어느 골목에서는 인부 서너 명이 땅을 들들들 파다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논의에 빠져들고, 꾀죄죄한 옷차림의 아이가 흘러내리는 콧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그걸 쳐다본다. 그 옆에는 북새통 속에서도 천하태평 늘어져 있는 늙은 개도 보인다.

공사 중인 사람들

기다란 호스로 골목 구석구석 물을 뿜어 대는 청소차도 심심찮게 만난다. 배설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떠돌이 개들 때문인지, 늦은 밤 으쓱한 골목에 오줌을 뿌리는 남정네들 때문인지 바르셀로나 골목 청소차는 항상 바쁘다.


시간이 먼지만큼 쌓인 오래된 가게에서는 골동품도 팔고 엘피판도 판다. 쇼윈도에 이마를 대고 가게 안의 물건을 들여다본다. 문을 밀고 들어가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처럼 다른 시간 속으로 빠져들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비가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진다. 더운 날씨에 가끔 후드득 내리는 비는 길거리의 사람들을 순식간에 정리시킨다. 딸내미 샌들을 사러 신발 가게를 기웃거리다 딸내미 시선이 비즈공예 재료 가게에 꽂힌다.

“엄마! 저기.”


딸내미는 벌써 가게에 들어가 황홀한 눈으로 재료를 탐색한다. 목걸이, 팔찌, 반지 등 장신구 재료 도매상이다.

손재주 없는 엄마와는 달리 딸내미는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잘한다. 벽을 가득 채운 다양한 모양과 재질, 색감의 재료에 딸내미의 눈과 손은 바쁘게 움직인다.


“엄마, 이거 어때? 이쁘지? 이건? 엄마 이거 사서 팔찌 만들어 줄까?”

엄마가 가게를 나가자 재촉할까 조바심이 나면서도, 어떤 재료를 사서 뭘 만들까 신이 난다. 백발의 가게 주인장은 우리의 질문에 귀찮은 내색 없이 답을 해주고, 재료를 찾아준다.


딸내미의 흐뭇한 미소를 보니 나도 덩달아 마음의 품이 넓어진다. 야경투어 가이드가 나에게 했던 매몰찬 짧은 답변도 그럴 수 있겠다 이해가 되고, 교통 티켓으로 나를 속이려 했던 바르셀로나 사기꾼도 그런 사람도 있겠지 이해가 다 된다.

다양한 재료를 팔던 가게


명품 쇼핑은 아니지만 우리만의 뿌듯한 쇼핑을 끝내고 거리로 나선다. 비를 맞은 거리는 축축하게 젖어있고, 어느새 저녁 어스름에 가로등 불빛이 깔린다. 신발 가게들은 이미 문을 닫았다. 딸내미는 당분간 발가락 덥다 땀 찬다 하면서 운동화를 신고 다녀야 하겠지만, 지금 내딛는 발걸음은 가볍다.


“엄마, 이거......”

여행을 마치고 며칠이 지난 후, 딸내미가 내민 손에는 바르셀로나 가게에서 산 재료로 만든 팔찌가 놓여있다. 흰 구슬, 까만 구슬, 반짝이는 구슬을 흰 줄에 끼우고, 중간중간에 작은 금속 포인트를 넣어 만들었다. 무엇을 어떻게 조합해서 만들까 생각해보고 딸내미가 손으로 직접 엮어 만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팔찌다.

“고마워. 딸냄.”

엄마가 주지는 못하고, 딸내미에게 자꾸 뭘 받기만 하네.


딸내미가 만든 팔찌를 하고 나가면, 길을 걸어도 강의를 하고 있어도 바르셀로나 기억은 언제라도 소환당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 날의 시원한 빗줄기를, 숙소로 향하던 우리의 가벼운 발걸음을, 재료를 하나씩 고르며 지었던 딸내미의 환한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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