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로마의 모나리자
눈물 자국 그대로 잠들었던 딸내미는 다락방의 아늑함 덕분인지, 아침에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말갛게 엄마를 부르며 일어났다. 라보나 광장, 판테온, 베네치아 광장을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늦은 밤 숙소에 들어와 거울을 보니, 종일 로마의 따가운 햇볕에 혹사당한 얼굴이 안쓰럽다. 오랜만에 클렌징크림으로 깨끗이 닦아 내고, 오이 팩으로 들뜬 얼굴을 진정시켜야지 하는 기특한 생각을 한다.
가방을 한참 뒤져 한국에서 덜어온 클렌징크림 플라스틱 통을 발견했다. 듬뿍 덜어 얼굴에 바르고 뽀득뽀득 문지른다. 생각보다 거품이 잘 나지 않는다. 너무 조금 발랐나 싶어 충분히 떠서 다시 문지른다. 냄새가 조금 꾸리꾸리 하게 올라온다.
‘블링크’ 첫 2초의 힘, 어떤 일에 대한 무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문제 해결 방식으로 직관, 통찰력을 말한다. ‘뭔가 이상하다.’ 2초 안에 알아차려야 할 통찰력은 얼굴을 한참 문지르고 난 뒤 20초 후에 발휘된다. 의심이 몽글몽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딸냄~ 빨, 빨리 와서 이것 좀 봐봐. 이거 클렌징크림 맞지?”
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딸내미가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온다.
“이거, 이거 클렌징크림 맞지? 근데 거품이 잘 안 난다.”
딸내미는 플라스틱 통을 건네받아 들여다보고, 내 얼굴에 잔뜩 묻은 크림 냄새를 킁킁대고 맡더니 쿨하게 말한다.
“엄마, 이거 제모크림이야.”
“뭐, 뭐라고?”
“제모크림이라고, 옆구리 털 미는 거.”
“......”
얼굴에는 회반죽처럼 제모크림을 듬뿍 쳐 바르고, 동공 확장된 놀란 토끼눈을 하고 플라스틱 통을 들고 부들부들 떤다. 여행 짐 꾸리면서 화장품 무게라도 줄일 요량으로, 작은 플라스틱 통에 화장품을 덜어 담아왔다. 통에 이름을 써 붙여야지 생각만 하다가 정신없어 잊어버리고 여행을 그냥 떠나온 거다.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자. 그러니까 내가 지금 옆구리 털 미는 제모크림을 얼굴에 잔뜩 바르고 있다는 얘기지. ‘털’을 다 밀어버리는 강력한 크림이라면, 유일한 얼굴의 털, 눈썹도 모두 밀어버린다는 얘긴데...... 끔찍한 상상이 이성과 상관없이 바로 튀어나온다. 눈썹 없이 남은 여행을 계속해야한다 생각하니 이건 위기상황이다.
엄청나게 빠른 손놀림으로 씻고 또 씻어냈다. ‘크림 바르고 5분도 안되었을 거야. 그러니 괜찮을 거야. 아직 내 눈썹 붙어있을 거야.’ 그렇게 나를 다독이며,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들여다본다. 마치 성형 수술하고 처음으로 붕대를 풀고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불안한 마음으로.
붙어있을 거야. 붙어있어야 하고말고. 휴~ 다행이다. 아직은 붙어있다. 그래도 안심하긴 이르다. 시간이 지나면 부스스 눈썹 털이 힘을 잃고 모두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씻어낸 얼굴에 오이 팩을 붙이니, 따가운 햇볕에 노출되고 제모 크림에 혹사당한 피부가 따끔거린다. 눈썹 공포는 꽤 오래갔다. 자기 전에도 눈썹 붙어있나 비벼보고 잠결에도 비벼보고 아침에도 눈 뜨자마자 눈썹부터 비벼보았으니.
눈썹 사건을 듣고, 한국의 남편이 말했다.
“눈썹 모두 밀고 로마 돌아다니면, 너, 사람들이 모나리자인 줄 알겠다. 크크”
자기 마누라 평생 눈썹 문신하고 다니는 것 봐야 할 사람은 누군데, 그런 한가한 소릴?
점심을 먹으러 맛집 식당을 찾아갔다. 7가지 토핑을 얹은 피자와 페이퍼에 싸서 오븐에 구운 누들과 해산물 찜을 주문했다.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며, 식당의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를 둘러보던 딸내미가 말한다.
“엄마, 저기, 엄마 뒤 좀 돌아봐봐.”
뭔 재밌는 게 있는지, 딸내미의 눈도 웃고 입도 웃는다.
뒤를 돌아보니, 벽면을 가득 채운 와인 병 장식 위에 낯익은 그림이 걸려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다. 이제껏 수백 번도 더 봤던 그림인데, 오늘의 모나리자는 눈썹 없는 눈으로 나에게 말까지 건다.
“헤이~ 거기 로마의 모나리자. 반갑다.”
로마가 덥기는 더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