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이 도시의 아름다움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정신을 잃게 한다.’ -스탕달
스탕달이 말하는 ‘이 도시’는 지금 우리가 두 발 딛고 서있는 피렌체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사람을 병들게 하고 정신을 잃게 한다 표현했을까?
우피치 미술관을 관람하다 창밖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다. 아르노 강변에 저녁노을이 포근하게 내려앉고 베키오 다리를 물들인다. 강물과 다리, 언덕과 하늘의 경계가 노을빛에 허물어지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나에게도 오랜만에 평온과 고요함이 선물처럼 찾아든다.
다음날 우리는 두오모 성당의 둥근 돔, 쿠폴라 전망대에 올라가 보기로 한다.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래며 1시간 30분 동안 줄에 서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가야 한다는 숙소 아주머니의 조언을 가볍게 무시하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길을 나선 결과다.
좁고 어두컴컴한 464개의 계단을 조심스레 더듬으며 오른다.
“엄마! 자신 있지?”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작은 했지만, 올라갈수록 숨이 가쁘다. 그래도 딸내미 손을 잡고, 계단참 작은 창으로 스며드는 햇빛에 위안을 받고, 정상의 풍경을 기대하며 계단 하나하나를 오른다.
마주 보며 내려오는 사람들은 천장에 머리 조심하라 눈짓도 하고, 힘내라 응원의 말도 건넨다. 처음 만나는 낯선 이들과 같은 시간과 공간에 머물며 마음을 나눈다.
드디어 돔 꼭대기다. 이렇게 힘들게 올라왔으니 피렌체의 빨간 지붕 향연에 또 한 번 정신을 잃겠지 기대했는데...... 너무 햇볕이 쨍하다. 멋진 풍경이고 뭐고 그늘 찾아 숨기 바쁘다.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연인들의 애틋한 감정이 여기 어딘가 있을 텐데, 둘러봐도 그런 감성이 싹트기엔 햇볕이 너무 따갑다. 감성이고 연애고 내 몸에 느껴지는 더위와 추위가 먼저다.
그런 더위에도 낯선 타지에서 한국 학생이라는 공통분모만으로 안면을 트고, 탐색전에 진입하는 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여행 혼자 왔어요? 저희는 피렌체 보고 베니스로 넘어가요.”
“네. 저도 여기 보고 베니스로 가요.”
정보를 나누는 척하며 인연을 이어나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느라 서로 분주하기만 하다.
그늘에서 땀을 겨우 식히고, 피렌체의 빨간 지붕들을 실눈을 뜨고 구경하고 있는데, 딸내미가 다급하게 내 팔을 잡아끈다.
“엄마! 저기, 저기 좀 봐.”
한국 여학생과 탐색전을 시도했던 한국 남학생 두 명이 쿠폴라 하얀 기둥에 형광펜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쓰고 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하지 말라 손사래 칠 시간도, 달려가 막을 시간도 없었다. 이미 세계문화유산에 한글 낙서가 형광펜으로 부끄럽게 박혀있다.
이게 뭔 일인가? 설악산 바위에 이름 새기는 것은 우리나라 산이고 바위라고 백 번 천 번 양보한다 하더라도, 쿠폴라 기둥에 왜 자기 이름을 적는지? 자기가 두오모 성당을 설계했는지 돌 하나라도 옮겼는지 뭔 일을 했다고, 다른 나라 문화유산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지......
그들은 이름도 새겨 놓았으니 이제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유유히 자리를 떴다. 범죄현장에 범인의 이름을 고스란히 새기고.
딸내미는 눈앞에서 벌어진 철없는 한국 사람들의 행동에 격분한 나머지 뜨거운 햇볕 아래 부들부들 떤다.
“엄마, 어떻게 오빠들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이건 말도 안 되지.”
딸내미는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며 오빠들이 새긴 낙서를 물티슈로 지워보려 애를 쓴다. 대리석 기둥에 깊이 박힌 낙서는 지워지지 않고, 딸내미는 물티슈를 손에 들고 한숨을 쉬며 낙담한다.
“엄마, 내가 한글 낙서 지우는 세계 봉사단 구성해서 꼭 다시 올래. 그래서 내가 오늘 못 지운 낙서 꼭 지울래.”
“응, 엄마도 우리 딸내미가 그렇게 해주면 좋겠어.”
지금은 가슴 뭉클 용솟음치는 애국심에 그러겠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하며 오리발 내밀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 또한 딸내미를 잘 모르는 엄마의 성급한 결론이었다. 쿠폴라 기둥 낙서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딸내미는 한국에 돌아와 사이버 외교사절 ‘반크’의 일원으로 활약하는 반전을 보여주었다.
엄마는 딸을 참 모른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 은
어두컴컴한 두오모 성당의 계단을 다시 되짚어 내려오면서 보니, 올라갈 때는 눈에 보이지 않던 한글 낙서들이 눈에 보이고 또 보인다.
그런 곳에 낙서 좀 하지 마! 철없는 것들아!
꼰대 소리 듣기 싫어 잔소리 안 하고 싶은 나도 저절로 훈계가 입에서 튀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