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인터라켄] 남편,
쏘리 앤 땡큐

아주, 매우, 대단히 어려운 곡으로 연습하고 있어

by 글쓰는공여사

긴 여행은 아니어도 짧은 가족 여행은 간간이 다녔다. 일정도 이동거리도 짧으니, 여행하며 잊어버리고 싶은 일상은 여전히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마무리 짓지 못한 학원 교재며 학부모에게 보내는 평가서, 학교 시험 대비 스케줄. 떠나자마자 돌아와야 했던 짧은 여행은 털어내고 싶은 한 뭉텅이 일상을 고스란히 들고 갔다 다시 안고 왔다.


그런데 35박 36일 유럽여행은 달랐다. 한국에 두고 온 일상의 기억을 간직하기에 한 달은 너무 길었고, 지구 반 바퀴를 비행기로 날아가는 거리는 너무 멀었다. 인천에서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한 순간, 한국의 일상을 모두 잊었다.


잊고 싶어서라기보다 잊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서 있는 무대가 180도 뒤집어지고, 생소한 무대장치와 낯선 생김새의 배우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그들이 내뱉는 언어와 몸짓, 음악과 음식이 천지개벽하듯 모두 바뀌었는데, 이전의 기억이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영혼을 담고 다니는 육체의 오감이 들뜨고 부산스럽게 작동했다. 도시에 처음 올라와 신문물에 놀란 시골처녀처럼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혀로 음미하고 느꼈다. 몸이 깨어나니 영혼도 덩달아 나무에 새 순 돋듯, 상처에 새 살 돋듯 살아났다.


두고 온 것은 모두 잊을 만큼 길고 먼 여행이었는데, 그래도 양심은 있었던지 남편은 가끔 마음에 걸렸다. 스위스 융프라우 눈보라 속에 서있을 때, 리기 산 정상에서 호수에 둘러싸인 마을을 내려다볼 때, 푸른 초원 위의 소박한 스위스 시골집을 볼 때, 음악과 함께 하늘을 태우던 불꽃놀이를 볼 때. 함께 나누지 못한 아쉬움에 스위스에서는 더 자주 생각이 났다.


인터넷으로 가족 밴드를 만들어 숙소에 들어오면 연락하고, 사진도 보내고 가끔은 스카이프로 화상통화도 했다.

남편이 가족 밴드에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일어났나요?”

“나갔나요?”

“숙소에 들어왔나요?”

“오늘 뭐했나요?”

“잘 도착했나요?”

“별 일 없나요?”

“바쁜가요?”

“통화할까요?”였다.


남편은 우리가 나라를 바꾸고 숙소를 이동할 때마다, 길치와 기계치 능력을 골고루 갖춘 내가 과연 숙소를 제대로 찾아나 갈까 노심초사했다.


그래도 똑똑한 딸내미 옆에 있으니 뭔 일 있을까 싶다가도, 소식이 없으면 비행기는 제대로 탔는지, 숙소 가는 길은 제대로 찾았는지, 소매치기는 당하지 않았는지, 심신 미약 아내와 어린 딸내미에 관한 상상의 시나리오를 수백 번 썼다 지웠다 했을 것이다.


놀러 다니느라 즐거운 철없는 아내는, 남편이 얼굴 보고 싶다고 화상 통화하자 하면 몇 번 숙소 비쳐주는 시늉만 하다가, 우리 빨리 나가 봐야 해 하면서 매정하게 전화를 뚝 끊었다. 황당해할 남편은 나 몰라라 하고 딸내미 손잡고 길을 떠났다.


핸드폰 속 목소리는 끊기고, 옆방에서 드르륵드르륵 늦은 밤 정적을 깨는 고슴도치 쳇바퀴 돌리는 소리만 들리는(‘또치’라는 고슴도치를 키웠다) 긴 고독한 밤을 35번이나 보냈을 불쌍한 남편.


여행 떠나기 전, 큰 맘먹고 선심 쓰듯 클래식 기타를 사주었다. 35일 동안 아주, 매우, 대단히 어려운 곡으로 한 달 내내 연습하며 지내고 있으라고. 남겨진 남편이 안쓰럽고 미안하긴 한데, 딸내미 손잡고 떠나는 첫 유럽여행의 설렘과 기대가 그 마음을 단 번에 눌렀다.


기타.jpg 남편에게 기타 선물을 안기고

로마에서 함께 투어를 했던 여학생에게 ‘스냅무비’라는 간단한 동영상 만드는 앱 사용법을 배웠다. 짧은 30초 동영상을 가벼운 음악과 함께 가족 밴드에 올렸다. 영상 속에서 딸내미는 머리를 찰랑대고 장난기 가득한 환한 웃음을 거리에 뿌렸다.

남편은 그 짧은 영상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고 수십 번을 봤다 한다. 그 영상을 보고 나서야 잘 지내는구나 안심이 되었다 한다.


우리가 즐거운 유럽여행을 하는 동안 남편은 장인, 장모님 생일을 챙기고, 자기 생일에는 35일 동안 매일 삶아먹던 메밀국수를 그날도 변함없이 또 삶아먹었다 한다.


여행 이후 남편은 그렇게 좋아하던 메밀국수 먹자는 말을 단 한 번도 안 했다.


평생 잊지 못할 멋진 여행을 우리에게 선물한 남편, 쏘리 앤 땡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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