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좀 징징대고
육점이네와 헤어지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인터라켄에서 스위스 루체른으로 두 시간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다시 딸내미와 단 둘이 여행을 이어나간다.
‘산의 여왕’이라 불리는 1,797미터의 리기산 정상에 오른다. 잔뜩 흐려진 하늘은 후드득후드득 비까지 뿌리기 시작한다. 유람선과 산악열차를 타고 내려, 산 정상까지 우산을 쓰고 걸어 올라간다.
리기산 정상에는 덩그덩 덩그덩 무거운 방울을 매단 갈색 소들이 많이 보인다. 육중한 몸을 흔들며 풀도 뜯어먹고, 귀찮게 달려드는 파리도 쫓느라 나름 바쁘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높은 산 정상까지 와서 소들이 풀을 뜯는 이유는 뭘까?
한가롭게 소가 풀 뜯어먹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스위스 정부는 일정 시간 소나 돼지, 닭을 야외에 방목하면 보조금을 지급한다. 방목하는 산의 비탈길에 따라 보조금을 차등 지급한다 하니, 1,797미터 리기산 정상에서 풀을 뜯어먹는 요놈들은…. 주인들에겐 아주 소중한 놈들이겠군.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
리기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낮게 뜬 구름 자락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모였다 빠르게 움직이고 초원은 끝없이 펼쳐져 있다. 호숫가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마을의 풍경이 푸근하다.
서서히 비가 그치고 안개도 걷힌다. 햇살이 쨍하니 반짝거리며 축축한 땅 위에도, 팔랑거리는 소의 귓등에도 내려앉는다. 인증 사진 찍기를 한바탕 행사처럼 치르고, 준비해 간 샌드위치로 허기진 뱃속을 달랜다.
까마득한 산 아래 비탈에 조그만 벤치가 덩그마니 놓여있다. 앉아서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너무 가파른 위치다. 산 아래를 유심히 살피던 바로 내 옆에 어느새 할아버지 한 분이 서있다. 백발에 구레나룻까지 하얀 수염이 풍성하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서 만난 백발 하얀 수염 할아버지라면….
하이디 할아버지를 만난 반가움에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내려가는 길이 있나요?”
"Yes."
“걸어갈 수도 있나요?”
“Yes. 길은 당신이 걸을 수 있다는 의미이지. 이쪽으로 걸어가면 저기 아래 벤치가 있어.”
할아버지는 내가 유심히 지켜보던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나의 조바심 섞인 질문에 하이디 할아버지는 숨을 가볍게 한 번 내쉬며 말했다.
“Life is always dangerous. But, If there is a road, you can walk there.”
인생은 항상 위험한 거야. 그렇지만 길이 있다면, 너는 거기에 걸어갈 수 있는 거지.
왜 내가 먼저 낯선 할아버지에게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길을 찾고 있던 것도 아니고 물건 값이 궁금해서 물어본 것도 아닌 그런 질문을.
생각지도 못한 할아버지의 심오한 대답을 음미하다 옆을 보니 어느새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짧은 사이에 산을 내려갔을 리가 없는데….
“딸냄~ 혹시 너 흰 수염 덥수룩한 할아버지 봤어?”
“...... 뭔 할아버지?”
옆에서 사진 찍기 놀이 중이던 딸내미는 엄마가 허깨비를 봤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디로 갔을까? 방금 여기 있었는데…. 신비하고 오묘한 기분이 든다. 나에게만 보였던 걸까? 스위스까지 여행 온 나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걸까? 상상의 날개를 펴고, 오늘도 나만의 영화 한 편을 마음으로 찍는다.
리기산에서 루체른으로 돌아가려고, 산악열차를 타고 내려와 케이블카를 탔다.
산악 케이블카는 중간 턱을 지날 때마다 심하게 흔들렸다. 흔들릴 때마다 눈을 질끈 감고, 딸내미 손을 꽉 잡고 케이블카에 몸을 맡겼다. ‘인생은 항상 위험한 거지.’ 하이디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함께 케이블카를 탄 한국 아주머니가 무서운 마음에 남편을 어찌나 쥐 잡듯 몰아세우는지, 푸른 초원 위에 한가로이 풀 뜯는 소구경 보다 그게 더 재밌다.
“그러니까 왜 타자고 했어? 왜 타자고 했냐고? 내가 무섭다고 안 탄다고 했는데 당신이 우겨서 탄 거잖아? 난 몰라, 난 몰라. 다 당신 탓이야.”
아주머니도 겁나고 무서워서 그랬겠지만, 좁은 케이블카 안에서 아주머니 투정을 다 알아듣고 함께 받고 있는 한국 사람들의 민망함이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닌다.
아주머니에게 아다지오(아주 느리고 침착하게)에서 시작해서 포르티시시모(아주 세게)로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아주머니, 인생은 항상 위험한 거지요. 그렇지만 케이블카 타고 내려가는 길 있으면 곧 땅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줌마!!!! 그만 좀 징징대고~ 남편 손 꼭 잡고~~ 조용히 내려가면 안 될까요~~~~~~~?”
아! 하이디 할아버지 교훈은 이럴 때 써먹으라고 나에게 조용히 얘기해 준 게 아닐 텐데, 내가 응용력이 좀 떨어지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