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루체른] 죽어가는 사자를
보러 가는 길

이것마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 아닌지

by 글쓰는공여사

저녁 어스름에 강줄기가 짙게 젖어갈 무렵, 루체른의 구시가지를 구경했다. 버려지는 물건을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재탄생시켜 판매하는 업사이클링 가게를 구경하다, 엽서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하이디 할아버지와의 대화의 여운이 아직 뒷머리를 잡아당기고 있어서 그랬을까?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처럼, 가을 햇살처럼, 밤하늘의 부드러운 별처럼 엽서의 글귀가 다가왔다.


“이것은 너의 삶이다

네가 사랑하는 것을 하라, 자주 하라

어떤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라

......

분석하기를 멈추라, 삶은 단순하다

모든 감정은 아름답다

음식을 먹을 때는 마지막 한 입까지 감사하라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들에게 마음과 두 팔과 가슴을 열라

우리는 서로의 다름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그들의 열정에 대해 묻고

너의 꿈과 영감을 그들과 나누라


자주 여행하라

길을 잃는 것이 너 자신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기회는 단 한 번만 온다, 붙잡으라

삶은 네가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네가 만들어 내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 밖으로 나가 만들기 시작해라

인생은 짧다

너의 꿈을 살고 너의 열정을 나누라"

-홀스티 선언문

엽서.jpg 바로 그 엽서

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모든 것들이 스위스에 정말 있었다. 워낭 소리 딸랑거리며 한가롭게 풀 뜯는 소도 있었고, 파란 하늘 밑에 만년설 꼭지를 매단 산도 있었다. 패러글라이더들이 펼치는 색색의 캐노피도, 눈이 감기고 입 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가는 달콤한 초콜릿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여행을 다녀와 스위스를 생각나게 한 것은, 하이디 할아버지와 나눈 짧은 영어 몇 마디와 재활용품 가게 귀퉁이에서 만난 엽서의 글귀였다. 엄마가 왜 이 엽서를 마음에 들어하는지 이해하기 힘든 딸내미는 엽서 글귀를 자꾸 읽어보는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아침에는 리기산을 올라갔다오고 오후에는 구시가지도 구경하고 걷고 또 걸어 무제크 성벽까지 봤다. 길치, 몸치 모녀 여행치고는 만족할만한 성과다.

_8064109.JPG 엄마 이쁘게 찍어달래 했더니…

여기서 딱 일정을 멈추고 숙소에 돌아가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어야 했는데, 엽서의 글귀 ‘인생은 짧다.’가 여행을 왔으니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욕심으로 잘못 불이 붙는다.


“딸냄! 우리 빈사의 사자상까지 보고 숙소 들어가자.”

“그게 뭔데?”

“음…. 죽어가는 사자 조각상이래.”

“죽어가는 조각상이라고? 그거 안 보면 안 돼? 나 다리 아프고 배고프고 힘든데….”


왜 딸내미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을까? 다리 아프고 배고프고 힘들다 얘기했는데, 정신 못 차리는 엄마는 딸내미를 어르고 달래고 협박해서 기필코 끌고 간다. 딸내미 지쳐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죽어가는 사자상 보자고.


“조금만 걸으면 돼. 그것까지만 보고 가자. 루체른 여행 온 사람들은 다 보는 거래. 여기까지 와서 그거 안 보면 후회한대.”


새초롬해진 딸내미는 마지못해 지친 발을 질질 끌며 끌려온다. 모퉁이를 돌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길을 걷고 또 걷는데 ‘죽어가는 사자’는커녕 살아있는 사자도 한 놈 안 보인다. 억지로 딸내미를 끌고 가는 나는 눈치가 보이고, 힘들고 지친 딸내미는 엄마가 이해가 안 된다. 우리 사이는 또 5센티미터 멀어진다.


드디어 어스름이 깔릴 무렵, 바위에 새겨진 빈사의 사자상을 만났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키다 전사한 스위스 용병 786명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자상이라는데,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하며 부러진 창을 꽂은 채 지쳐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 그 많은 용병들은 죽기 전에, 자신의 목숨을 내걸 만큼 가치 있는 일인지 생각해 봤을까?

_8064130.JPG 죽어가는 사자 저기 있다

“인간은 불행에 처해서야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빈사의 사자상 앞에서 둘 다 탈진 상태에 빠지니, 내가 뭔 짓을 했는지 나도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미쳤지…. 힘들다는 딸내미 이거 보자고 여기까지 끌고 왔나 정신이 번쩍 든다.


누구에게 뭘 봤는지 자랑하려고 다니는 여행도 아니고, 숙제처럼 꼭 가보고 보고서 내야 하는 여행도 아니다.

딸내미와 벌어진 마음 채우는 여행이니, 딸내미를 보고, 딸내미 말을 듣고, 딸내미 마음을 느껴야 하는데…. 다리 아프면 아무데서나 주저앉아 쉬고, 힘들다 하면 ‘다음 기회에’를 외치고 숙소에 들어오고, 배고프다 하면 뭐라도 챙겨 먹여야 했는데….


딸내미는 좁은 이층 침대에 올라가자마자 잠에 빠진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딸내미에게 또 미안하다. 미안한 마음 덜어내려고 떠나온 여행에 자꾸 미안함만 하나씩 더 쌓이니, 여행의 마지막 결산이 두렵다.


피곤한 하루였는데 뒤척이다 늦게 잠이 들었다. 딸내미와 마음 거리 좁히려는 노력마저도 이번 여행에서 한 번에 해결하려고, 무리하게 애쓰며 또 ‘최선’을 다하고 있지는 않는지, 마음이 뒤숭숭 흙탕물 휘저은 듯 새벽까지 가라앉질 않았다.

CAM01587.jpg 루체른 이비스 버짓 호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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