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특제 소스
“엄마! 이 얘기 알아?”
루브르 박물관의 <에로스의 키스로 되살아난 프시케> 조각상 앞에서 딸내미가 묻는다.
내가 그 얘기를 알던가? 안다하면 또 퀴즈 낸다고 난리 치겠지? 그러다 얕은 지식 바닥 보이면 더 민망하니, 차라리 모른다 하자.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내가 얘기해 줄까?”
이 말 한 마디면 그 자리에서 꼬박 20분이다. 딸내미는 침을 꼴깍 삼키고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입에서 실타래 풀려나오듯 술술 얘기가 나온다. 스토리의 기승전결은 기본이고 자세하고 꼼꼼하다.
“에로스의 얼굴을 보지 말라는... 언니의 꾐... 얼굴을 보고만... 질투를 느끼고... 상자를 열지 말라는... 호기심... 잠에 빠져... 키스로 다시 살아났대.”
나도 잠에 빠지려다 다시 살아난다.
딸내미 얼굴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에게 신화를 얘기해준 뿌듯함이 번지고, 내 눈에는 딸내미의 애서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20권이 어른거린다. 이번 여행에서 못 들은 신화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역사에 관심 많은 딸내미는 어느 도시에 도착하던 박물관에서부터 구경을 시작한다. 공룡의 뼈다귀나 이상한 글자가 그림처럼 박혀있는 낡은 종이, 매끈하고 하얀 나체 조각상, 미술 교과서에서 봤던 유명한 그림. 현재나 미래보다 과거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것을 더 즐기는 열세 살 소녀라니…. 평범한 취향은 아니다.
그래서 파리는 딸내미에게 즐거운 놀이터다. 6일 동안 파리의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패스를 구입하고, 부지런히 찾아다닌다.
박물관에는 여섯 살 정도 되는 꼬마가 그림 앞에 쭈그리고 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린다. 조그만 손에 연필을 꼭 쥐고, 저 높이 걸린 벽의 그림을 한 번 들여다보고 스케치북에 선 한 줄 긋고, 몸 한 번 배배 꼬고, 다시 한번 쳐다보고 선 한 줄 더 긋는다. 진지한 그 모습에 웃음이 난다.
돋보기안경을 벗었다 썼다 하며 작품을 감상하는 할머니도 보이고, 그림 앞에 이젤을 당당하게 펴고 모사를 하는 젊은이도 보인다. 파리에서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 예술이 가깝게 있다.
루브르 박물관 1층을 둘러보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지금 관람하고 계시는 관람객들은 1층 복도로 긴급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비상대피 방송이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긴 신호음만 계속 울린다. 무슨 일일까? 박물관 오는 길에 마주친 긴 장화에 방패를 든 경찰 데모 진압대의 모습이 떠오르며 불안이 크기를 키운다. 주위를 둘러보니 딸내미가 없다. 방금 전까지 옆에 있었는데….
“딸냄! 딸냄!”
애타게 부르다 2층에서 엄마를 찾으며 내려오는 딸내미를 만나 얼른 손을 덥석 잡고 대피 장소로 이동한다.
전시실에 있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썰물 빠지듯 빠져나간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경보가 해제되고 관람을 계속해도 좋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그래도 한 번 긴장했던 마음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아무리 안전하다는 나라를 여행해도, 딸내미 데리고 여행하는 엄마는 더 소심해지고, 안전에 더 민감해진다.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여행을 마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루브르 박물관에서 꼬박 네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젊어서는 돈이 없어 못하고, 늙어서는 못 걸어 다녀 못한다는 여행. 40대에 다리가 후들거리면 60대에는 아파트 주위를 도는 게 여행이라 말할까 두렵다.
“엄마! 꼬기 먹자!”
저질 체력 회복하려면 고기라도 먹자. 천 근 같은 다리를 겨우 들어 올리며 마트를 찾아 들어간다.
배고플 땐 장 보는 게 아닌데, 커다란 송이버섯과 탱탱해서 터지기 일보 직전인 토마토와, 착한 가격의 스테이크용 소고기와 만원도 안 되는 와인 한 병을 종이 백에 담고, 우리는 숙소 5층 계단을 오른다. 배고프면 심난해지는 딸내미는 언제부턴가 말이 없다.
소고기를 육즙 가득 부드럽게 지글지글 프라이팬에 굽고, 커다란 송이버섯과 양파를 얄팍얄팍 썰어 살짝 구워 접시에 푸짐하게 쌓아 올리고, 고소한 소스를 뿌린 샐러드를 곁들인다. 그리고 와인 잔에 레드 와인을 조금 따라 딸내미와 건배를 한다.
“딸내미도 한 잔!”
“그래~”
“짠!”
여행 다니며 딸내미와 맛있는 맥주도 나눠 마시고, 찰랑거리는 레드 와인 잔도 이제는 서로 부딪친다.
바르셀로나에서 한창 더운 날씨에 해물 빠에야를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였다. 메뉴를 들여다보던 딸내미에게 말했다.
“목마르다. 시원한 모히또 시켜먹자.”
“엄마, 그거 술 아니야?”
“무슨 수우울? 모히또는 주스야. 라임주스. 달콤하고 시원해. 한 번 먹어봐.”
나는 즐겨마시는 주스처럼 아는 체를 하고, 우리는 사이좋게 모히또 두 잔을 시켜 쭈욱 들이켰다.
식당에서 나와 가우디 건축물 까사바뜨요를 구경하고 있는데, 딸내미가 말했다.
“엄마, 좀 어지러운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져 입 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가고 있던 중인 나도, 갑자기 별안간 느닷없이 녹색 이파리가 꽂혀 나온 모히또에 의심이 팍 갔다.
숙소에 들어와 딸내미 눈치를 보며 화장실에서 몰래 네이버 지식백과를 검색해보았다.
“모히또는 럼(Rum)을 주재료로 넣은 럼 스매시(Rum Smash)에 레몬이나 라임주스를 첨가한 칵테일의 일종으로, 미국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던 것으로 유명하다.”
모히또는 술이었다. 헤밍웨이가 즐겨마시던.
난 열세 살 딸내미에게 술을 먹인 것이다. 쏘리다. 딸냄. 엄마가 술은 잘 몰라서….
파리 레스토랑에서 초록색 특제 소스와 함께 나오는 에스카르고 달팽이 요리도 먹어보고, 바게트 빵이 둥둥 떠다니는 양파 수프도 감탄하며 먹었다. 야들야들 결대로 잘 찢어지는 오리찜도,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달콤한 초코 케이크도 모두 맛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파리 숙소의 스테이크를 이번 여행 최고의 식사로 꼽는다. 사진발에 속아 예약한 숙소를 끙끙대고 올라와, 잘 열리지도 않는 창문을 삐걱거리며 열고, 뒤척일 때마다 스프링 소리 나는 침대에서 잠을 잤어도, 스테이크 요리는 그 불만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하루 종일 피곤하게 걷고, 지치고 허기질 때 숙소에 들어와, 함께 스테이크를 굽고 샐러드를 만들 때 우리는 참 편안하고 즐거웠다.
“엄마, 아무래도 스테이크 먹으러 유럽에 다시 가야 하나 봐!”
여행을 끝내고 파리에서 요리해 먹은 스테이크가 그리워, 온갖 재료 다 사와 그대로 재현했는데도 그 맛이 안 난다.
파리에서 우리는 유독 배가 많이 고팠던 걸까? 아니면 ‘여행’이라는 특제 소스를 스테이크에 뿌려 먹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