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나도 잊고싶다
나의 과거

무료로 드린다니까요

by 글쓰는공여사

쌀 500g, 한국 라면 8개,

배 즙에 재워 부드러운 장조림 통조림 2개,

바삭하고 향긋한 돌김 포장 김 4개,

올리브기름으로 구운 김 1통,

사계절 쌈장 1통, 고추장 3통, 쇠고기 볶음 고추장 튜브 형 1개,

매운 갈비양념과 닭 한 마리 양념 반통,

볶은 김치 6 봉지, 누룽지 4 봉지, 된장 수프 8 봉지,

인스턴트커피 9개, 나무젓가락 12개


내일 한국에 돌아간다. 35박 36일 여행을 끝내고.

그런데 캐리어에 다시 싸 짊어지고 가야 할 음식 재료는 아직도 이렇게 많이 남아있다.


요놈들과 비행기도 함께 타고, 런던과 바르셀로나 지하철 계단도 함께 오르고, 아홉 군데 숙소에서 잠도 함께 잤다. 꼭 먹어야 할 비상약도 아니고 꼭 입어야 할 속옷도 아닌데,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바리바리 싸서 이고 지고 5개국 8개 도시를 함께 다녔다.


'이태리에서는 많이 못 해 먹었는데, 물가 비싼 스위스에서는 자주 해먹을거야. 마지막 여행지 파리에서는 분명 필요하겠지.' 혹시 필요할지도 모를 그 날을 위해 남으면 남은 대로 싸서 짊어지고 다음 여행지로 향했다. 그러다 보니 무거운 캐리어 들어준 바르셀로나 마르셀은 고마웠고, 캐리어 안 들어준 파리의 앤은 미웠다.


이 짐을 다시 캐리어에 넣고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참 암담하다. 선물이라고는 남편에게 줄 커피 한 봉지, 파리에서 산 화장품, 부모님 드릴 가죽장갑이 전부인데, 캐리어에는 라면과 고추장 양념이 아직 가득이다. 모두 필요하다고 큰소리치며 캐리어 터져라 싸 짊어지고 왔는데, 이를 어쩌지?


내 마음 저 밑바닥에 생존 욕구와 불안이 거머리처럼 철썩 달라붙어, 비행기를 타도 에펠탑을 봐도 스위스 불꽃놀이를 봐도, 하이디 할아버지에게 인생 얘기를 들어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나 보다. 어떻게든 이 애물단지를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선심 쓰듯 파리에 살고 있는 한국 분에게 드리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선한 의도 10%, 애물단지 해치우고 싶은 의도 90%.


유럽여행 카페에 글을 올렸다.

“지금 파리 리퍼블리크 역 근처입니다. 낼 한국 갑니다. 아침 10시 전 픽업 가능하신 분께 무료로 드립니다. 라면, 쌀, 고추장, 장조림, 김 등 거의 밥해먹지 않아 남았습니다.”


들어오는 글을 계속 확인하고 그중에 일정이 맞는 분과 내일 아침 10시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분께 드릴 짐을 따로 비닐봉지에 싸고, 캐리어를 닫았다.


‘아! 다행이다. 진작 이렇게 할 걸. 모두 다 싸 짊어지고 한국에 갈 뻔했네.’

홀가분한 마음으로 파리에서 평온한 마지막 밤을 보냈다.

_8144910.JPG 한국에 돌아오는 대한항공편 비행기

하지만 세상일은 역시 기대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아침 10시에 픽업을 약속한 분이 사정이 생겨 오지 못하겠단다. 미친다. 숙소를 나가면 인터넷도 안 되니 핸드폰도 무용지물인데, 이제는 이 애물단지를 누구에게도 건네줄 방법이 없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글을 다시 남기고 이동을 시작했다.

“지금 파리~ 라면쌀김고추장깻잎김치~ 북역 코인라커 오늘 3시에 오시면 무료로 드립니다.”

오후 3시 북역 코인라커에 도착했을 때, 주위에는 한국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이 한 번 ‘소유’ 한 적이 있는 물건의 가치는 실제 물건의 가치보다 더 높게 평가한다 한다.

‘그래도 먹는 걸 어떻게 버릴 수가 있냐?’ 이 애물단지도 나에겐 그런 존재였던지, 차마 보관함에 버려두지 못하고 들고 왔다. 물론 이번에도 굶어 죽을까 불안근심걱정하는 이십만 년 역사를 가진 인간 뇌의 완승이다.


좋은 일 하듯 ‘무료로 드립니다.’ 생색내고, 그것마저 뜻대로 안 되니, 기차역 구석에서 캐리어에 그 애물단지들을 다시 꾸역꾸역 꾸겨 넣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하다.


공항에 도착해서 댓글을 확인해보니, 오후 3시가 조금 넘어 어떤 분이 그 기차역에 픽업하러 왔었다는 사연이 올라와 있다. 그러니까 왜 ‘조금 넘어’ 왔냐고? 우리는 한국에 돌아갈 비행기가 예약되어 있는 여행자인데 말이다.


결국 그 먹거리는 영국과 스페인, 이탈리아와 스위스, 그리고 프랑스 5개국 순방을 무사히 마치고 우리나라에 다시 귀국했다. 우리와 함께. 한국음식 아쉬운 파리의 친구에게 넘어갈 위기도, 파리 북역 보관함에 버려질 위기도 모두 넘기고.

_8144922.JPG 무사 귀환 기념 사진


“우연이야말로 최고의 조수다.” -영화 <그래비티> -


지구에서의 응답도, 의지할 동료도 없이, 숨 쉴 산소는 떨어져가고, 폭파된 인공위성 잔해는 마구 덮쳐오는 우주 한 가운데에서, 라이온 스톤 박사가 지구로의 귀환을 시도하며 한 말이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우연을 믿는 우주비행사도 있는데, 난 고작 36일 여행길에 한식 못 먹을까봐 그렇게 싸가지고 갔다가 다시 싸짊어지고 왔다.


내가 이 사건을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봤는데, 아무리해도 자존감이 안 긁어모아진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인정하자. 내가 한 짓이지만 민망하고 부끄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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