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내내 불만과 꼬투리 잡기를 하고 있다면
"성적 다 올려놓았는데 그만둔다고 나간 놈들도 원망스럽고, 원장이 한 소리할까 봐 그렇게 눈치가 보이는 거예요. 제가 받는 페이는 얼마나 짠지 서울과 비교해보고 깜짝 놀랐어요. 요즘은 일주일에 8시간을 한 놈 앉혀놓고 수업을 하려니 의욕도 안 생기고…."
'어떻게 지내요?'라는 내 말에 학원강사 7년 차인 30대 모임 멤버가 정신없이 말을 쏟아놓는다. 피곤에 쩔은 얼굴로 그녀가 내뱉은 긴 넋두리를 들으면서, 그녀만 빼고 우리는 모두 알아차린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에서 발을 빼고, 다른 새로운 세상에 발을 담글 때라는 걸.
"남편이 어찌나 밥을 쩝쩝거리며 먹는지 듣기 싫어 미치겠어. 총각김치는 무서워 식탁에 못 올린다니까."
"남친이 비실비실 근육은 하나도 없이 건들거리는 게 그렇게 꼴 보기가 싫고, 하는 말마다 날 서운하게 하고, 이젠 더 이상 싸우기도 싫어요."
복스럽게 먹는다 생각했던 남편 식습관도 쩝쩝 후루룩 끄윽 소리가 귀에 미치게 거슬리고, 아이돌처럼 가실가실한 남친의 몸매가, 목은 거북목, 가슴은 새가슴, 다리는 젓가락처럼 보인다면?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들이 눈에 거슬리고, 내가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고 있다면, 이젠 그 세상과는 끝장을 볼 때다.
첫 직장인 출판사 편집부에서 4년을 넘기고 있을 때, 나이 많은 신입이 내 앞자리에 들어왔다. 심성도 착한 그분의 단 한 가지 문제는 3초마다 내는 끅끅 소리였다. 무슨 이유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난 조용한 사무실에 앉아 동료의 끅끅거리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일을 하려니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별로 그 소리가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귀마개로도 해결 안 되는 이 상황을 무례함을 무릅쓰고 직접 얘기도 했다.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매번 소리를 내서.."
회사 다니는 의욕도 잃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몸에서 나는 소리가 얼마나 끔찍한지 얘기를 했다. 6개월쯤 버티다 결국 내가 그만두었다.
그만두고 보니, 내가 회사를 그만둔 건 끅끅이 동료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내 마음이 그곳에 없었는데, 그만 둘 이유를 끅끅이 동료에게 찾았던 것뿐이었다. 30분 내내 그 일에 대해 그 사람에 대해 불만을 얘기해도 끝이 없다면, 이미 그 세상은 지옥이다. 빠져나와야 한다. 30분도 괴로운데, 3시간, 30시간, 일 년을 참고 버틸 순 없다.
불안하다. 이유는?
불안하다. 이미 끝장난 세상 계속 붙들고 있을까 봐. 불안의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이미 끝장난 세상 계속 붙들고 있을까 봐. 다른 새로운 세상에서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지금 하는 일도, 사귀는 남친도, 함께 사는 남편도 싫은데, 내가 옮겨가야 하는 새로운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불안하고 마음이 붕 뜬 것 같고, 가야 할 목표를 잃고 헤매는 기분이 든다. 지금 내가 속해있는 세상이 내 세상이 아닌 건 분명한데 새로운 세상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하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새로 이사 올 사람은 정해졌는데, 내가 이사 갈 집을 아직 구하지 못했을 때, 지금 직장에서는 마음이 떴는데, 뭐 해 먹고살지, 새로운 직장은 구할 수 있을지 모를 때, 지금 이 사람과 더 이상 아니다 싶은데, 이 사람 없이 살아야 할 세상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하다.
지금 발 담그고 있는 세상의 문제에만 집중하면 나만 비참해진다. 내 꼴만 볼썽사납다. 지금 세상을 끝장내야 한다는 걸 인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탐색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형편없는 감자탕을 먹어보면, 왜 만족하지 못하는지 이유를 금방 안다. 뼈에 살도 별로 없고, 콩나물만 잔뜩 얹어져 있고, 수제비도 없고, 먹고 나서 입가심할 커피도 없다. 음식 하나를 먹어도 마음에 안 드는 이유는 열 가지도 넘는다.
직장이나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금 직장이 마음에 안 들면, 여기 있기 싫으니까 옮겨볼까 하는 거친 생각보다, 세세하게 구체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뭔지, 직장환경, 하는 일, 동료들과의 관계, 미래 발전 가능성과 한계도 냉철하게 살펴보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갈 탐색전을 세심하게 펼쳐야 한다. 통장잔고도 점검해보고, 조언해줄 지인도 찾아보고, 주변에 새로운 세상과 연결할 루트를 적극적으로 찾아봐야 한다.
가보지 않는 세상을 여기 세상에 발 담그고 있으면서 생각만 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지금 세상은 눈에 보이는 안정감과 익숙함이 있고, 나에게 보장된 지위와 혜택이 있다. 이걸 다 버리고, 처음부터 언 땅에 삽질하고, 씨앗 뿌리고 장마와 가뭄을 견디고 떡잎 하나 나오길 기다려야 하니 무섭고 두렵게만 느껴진다. 아직 안 가봐서 무서울 뿐이다.
그래도 끝장난 세상을 두려워서 꼭 붙잡고 있으면, 스스로 박차고 나올 기회마저 놓칠 수 있다. 내 몸과 마음이 다 너덜너덜 기진맥진해진 다음에,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걸어 나와야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만둬요."
"어떻게 그만둬요?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데요."
"바로 그만두기 힘들면, 기간을 정하고 그동안 적극적으로 다른 일을 찾아봐요."
새해 며칠이나 지났다고 또 다른 사람에게 배 놔라 감 놔라 한다. 한 시간 동안 화장실도 안 가고, 목마름도 잊고, 아끼던 펜이 어디로 굴러갔는지도 모른 채 열을 올린다. 지금 세상에서 발을 빼고 다른 세상을 찾아가는 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알면서도, 내가 또 헛짓거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