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을 앞둔 딸내미가 자신의 로망이라며 ‘혼여(혼자 여행)’을 가겠다 한다. ‘혼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뇌는 순식간에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 한 편을 뚝딱 완성시킨다.
우리는 왜 미래에 다가올 일에 최악의 상상을 하는 걸까? 남편과 말다툼 한 번하고 나면, 이혼하고 혼자 애 키우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단 몇 초 만에 완성하고, 소개팅 한 번 어긋난 걸 가지고 골방에서 고독사한다. 속 한 번 쓰린 걸로 머리 다 빠지고, 수술실에 누워있다 관 속에 들어가 있고, 비행기 잠깐 흔들린 것으로, 메이데이를 외치며 비상 착륙하다 폭발하고 나는 이미 죽고 없다. 뇌에 저장된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어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잘도 짠다.
불안하다.불안의 이유는?
불안하다. 최악을 상상하고 있으니.불안의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최악을 상상하고 있으니. 최악의 상상대로 내 인생 망하고 말까 봐.
우리 집 댕댕이 까뭉이는 매일 한두 시간씩 찐한 산책을 한다. 지나가는 개들에게 목줄이 끊어져라 달려들어 짖어대고, 딴 놈들이 싸질러놓고 간 오줌 냄새를 킁킁대느라 에너지를 다 쓴다. 집에 돌아와서는 철퍼덕 방바닥에 스티커처럼 붙어있다가도, 무슨 조그만 소리라도 나면 벌떡 일어나 짖으며 현관으로 달려간다. 항상 경계 태세다. 네 벽 막힌 집에서 안락하게 살면서 자기 천적이 어디 있다고 그러는지 우습다. 다 살아남으려는 본능이다.
까뭉이의 겨울 산책
인간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으로 온갖 지식 정보를 섭렵하고 ‘좋아요’와 ‘싫어요’를 세상에 마음껏 투척하며 인터넷을 누비면서도, 아직도 자기 목 위에는, 위험을 경계하는 5억 년 전 원시의 뇌를 얹고 다닌다. 인간은 생존 확보 본능을 가진 비관론자다. 장밋빛 미래보다 최악의 상상 시나리오를 쓰는 이유다.
심리 책에서는 불안한 사람들에게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라.'라는 조언을 한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면~
1. 불안의 이유를 알고 대처할 수 있다고? NONONO!!!
불안은 우리를 압도하고 소진 탈진시키며, 경우의 수는 미친 듯이 확장되어 멈추지 못하고 질주하는 브레이크 고장 난 트럭과 같다. 불안의 이유를 알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런 상상까지 가지 않는다.
2. 심적 타격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NONONO!!!
그런 생각은 여전히 내가 상황을 통제하려는,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확률은 극히 드물고, 미리 상상한다고 주삿바늘 덜 아픈 것도, 남자 친구 배신이 덜 쓰라린 것도 아니다.
최악을 상상하는 순간, 나의 감각과 느낌은 실제로 최악을 경험한다. 오늘 기분 개떡 되고 싶으면, 최악을 상상하라.
내가 개인과외를 해줬던 여고생은 실력도 있고 시험 준비도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안 올랐다. 몇 개월 관찰해본 결과, 그 아이는 자신이 만에 하나 받게 될 최악의 시험 점수가 두려워, 시험 전에 미리 보호막을 쳤다.
“선생님, 제가 생리통이 심해서….”
“선생님, 제가 친구랑 심하게 다퉈서….”
“선생님, 제가 잠을 못 자서….”
거짓말이었냐고? 아니다. 정말 아프고 다투고 못 잤다. 몸이 미리 아파줬다. 긴장과 불안이 고조되고, 몸이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미리 핑곗거리가 항상 생겼고, 그리고 시험을 못 봤다. 최악의 결과를 상상하고, 결과를 합리화할 이유까지 실제로 만들고 예행연습까지 했는데, 성적이 향상될 수는 없었다.
우리는혹시 내 몸과 마음이 아프고 다칠까 무서워 ‘최악의 상상’이라는 보험을 든다. 보험은 질병이나 사고를 일어나게 만들 가능성을 높인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더 무모해지고 자제하기가 힘들다. 담배 한 번 더 피고, 술 한 번 더 마시고, 신호등 한 번 더 무시한다. 최악을 상상하는 것은 극단으로 치닫게 될 상황이 일어날까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최종적으로 느끼게 될 고통의 분량을 미리 조절하려고 먼저 무리수를 치고 나가는 것이다.
그런 상상 대신에~
1. 이미 불안했던 일은 끝난 일이라는 걸 인정한다.
작년에 그랬으니까, 저번에 그랬으니까, 올해도 이번에도 그럴까 불안해한다. 힘들 일 겪으면 내가 다시 이런 일 겪을 수 있겠구나 불안해지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이미 끝난 일이다.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순간을 산다. 지난 불안을 다시 소환하여 적용시키며 최악까지 상상할 필요는 없다. 지금 나에게 당면한 문제, 딱 그만큼만 분명하게 명료하게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행동 대책을 마련해 실행하면 된다.
2. 불안하지 않는 것을 자꾸 경험시켜준다.
말로만 불안해하지 말자, 백 번 천 번 말해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안 대신 불안하지 않는 것들, 내 삶을 풍요롭고 기쁘게 해 줄 것들을 자꾸 나에게 경험시켜줘야 한다. 그래야 내가 안심하고 편안해진다.
3. 다양한 삶의 자원을 만들어간다.
모르면 불안하고, 안 해 봐서 불안하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내가 가진 단 한 가지 무기로 모두 막으려 하니 불안하다.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 토르의 묠니르 망치, 와칸다 실드, 스파이더맨 웹슈터…. 뭐, 이딴 것까지 준비하긴 어렵더라도 자신만의 삶의 어려운 일을 막을 자원들을 하나씩 마련해가 보자.
간장종지 같은 내 마음 밥그릇으로, 깨지기 쉬운 일반 유리 같은 내 마음 강화유리로 업그레이드시켜보자. 넘치면 어쩌나, 깨지면 어쩌나, 최악을 상상하며 떨지 말고 인생이라는 실전을 뛰자.
"그런데, 딸냄~~ 혹시 제주도 함께 갈 친구는 없을까?"
딸내미의 매서운 눈흘김이, 그동안 회복한 모녀 관계 파탄내기 전에, 난 슬그머니 까뭉이 목줄을 매고 산책길에 나선다. 겨울바람이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