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에 설거지 안 하면, 내일 밥 없다~~."
티스푼으로 국 떠먹고, 소주잔으로 물 마시는 사태까지 오면, 남편 압박에 들어간다. 그런 날 저녁이면 남편은 세상에 재미난 일들을 만사 제쳐 두고, 달그닥 달그닥 한 시간 넘게 임무를 수행한다.
어느 쪽이 바깥일을 더 많이 하느냐에 따라 집안일의 배분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설거지는 한결같이 남편 몫이다.
청소는 신혼 때 한 번 시켜보고 바로 포기했다.
"이게 청소를 한 거란 말이지?"
"응. 나름 한다고 했는데..."
나름 한다고 한 청소가 아무리 둘러봐도 변한 게 없다. 여전히 방바닥에도 책상 위에도 제자리에 복귀하지 못한 온갖 사물들이 길을 잃고 헤맨다. 정리정돈 DNA가 없는 게 분명하다. 청소를 시키는 건 재원 낭비다.
청소도 DNA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요리는? 결혼 전 긴 자취생활로 남편의 요리 실력은 꽤 괜찮았다. 뚝딱 떡볶이도 만들어주고, 뚝딱 김치볶음밥도 만들어줬다. 결혼하면 남편이 해주는 맛있는 음식, 많이 먹게 될 줄 알았는데... 떡볶이와 김치볶음밥. 그 두 가지가 할 줄 아는 전부였다.
남편 요리 실력만 믿고 결혼해서인지, 신혼초에는 놀랄 일이 많았다.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어묵 보고 놀라 냄비 뚜껑을 내던졌다. 냉동실에 꽁꽁 언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구분 못해, 돼지고기 미역국을 둘이 아무 말 없이 먹기도 했다. 그런 내가 뒤늦게 요리 신공을 발휘하면서, 남편의 요리 DNA는 자연스레 진화에서 퇴화로 노선을 갈아탔다.
청소도 요리도 아니라면 남편에겐 설거지만 남았다.
결혼초에는 설거지 줄여보려고 스텐 식판에 밥을 먹었다. 그래도 신혼인데 둘이 마주 보고 스텐 식판을 긁고 앉아있자니, 아무래도 정서적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남편은 30년 차 우리 집 설거지 담당이다.
설거지~쉽지 않습니다. 설거지: 먹고 난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
집안일 나눌 때 설거지의 사전적 정의와 범위를 토론할 시간을 가졌어야 했는데... 내 실수다. 남편의 설거지는 '싱크대에 놓여있는 그릇을 씻는 일' 딱 고만큼이다. 밥 먹자마자 커피 원두 가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서 식탁 위 그릇 정리도 내 몫이다.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이러다 설거지도 내가 하겠다 달려들까 봐.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이러다 설거지도 내가 하겠다 달려들까 봐. 얼마 못가 에너지 딸려 분통 터트리고 있을까 봐.
그래도 30년째 남편이 설거지를 계속하고 있는 동기는,
1. 전혀 터치하지 않는다.
숟가락에 말라붙은 밥 티가 붙어있고, 접시에 기름기가 끈적거려도 아무 말 안 한다. 그걸 보고도 아무 말 안 하려면 명상 4년 차는 되어야 하고, 칭찬까지 해서 고래 대신 남편을 춤추게 하려면, 계룡산에 도 닦으러 한 번은 다녀와야 한다.
2. 과하게 칭찬한다.
"우와~ 어젯밤 설거지했네?"
내 칭찬에 남편의 설거지 잔소리가 뒤따라와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준다.
"감자 껍질은 싱크대에 좀 버리지 말고, 프라이팬은 부드러운 주걱으로만 긁고."
설거지는 남편의 고유 영역이니 전문가의 조언을 꾹 참고 듣는다.
3. 서로 다른 기질을 인정한다.
오늘 안에 나무 10그루를 베어야 한다면, 난 그 말이 끝나자마자 도끼로 나무부터 찍고 있을 부류다. '100번 찍어 안 넘어갈 나무 없다'는 신념으로, 배터리 0% 되고 숨 꼴깍 넘어갈 때까지 나무 찍다 쓰러져 119에 실려간다.
남편은 다른 종족이다. 최적화된 도구부터 챙긴다. 없으면 사러 가고, 그마저도 마땅치 않으면 직접 만든다. 내가 응급실에서 링거 맞고 있을 때쯤, 남편은 그제사 벌목용 도끼를 갈거나, 전기톱으로 첫 번째 나무를 벨 준비를 하고 있을 게다.
설거지 영역도 다르지 않다. 남편은 철수세미, 망사 수세미, 양면 수세미, 컵 닦는 수세미, 온갖 종류의 수세미를 쭈르르 늘어놓고, 진군 앞둔 병사들처럼 출정 준비를 시킨다.
30년쯤 지나니 남편의 설거지가 진화한다. 어느 날 부엌이 반짝반짝하다. 그릇은 식기세척기 속에 들어가 있고, 가스레인지도 조리대도 윤이 난다.
"우와~ 너무 깨끗하다. 어떻게 이렇게 했어?"
"흠. 여기저기 지저분한 것들이 눈에 보이더라고."
'설거지도 내가 할게.'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라와도 참았더니 이런 날도 온다.
'취식은 공동의 프로젝트입니다. 배우자가 요리를 만들었는데, 설거지는 하지 않고 엎드려서 팔만대장경을 필사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귀여운 미남도 그런 일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혹자의 삶이 지나치게 고생스럽다면, 누군가 설거지를 안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김영민 칼럼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
집안일은 능력으로 하는 게 아니다. 마음으로 한다. 내가 해보니 상대도 그만큼 힘들겠구나 그런 공감하는 마음에서 계속하는 힘이 생긴다. 남편의 설거지도 진화하고 있다니, 고마운 일이다.
우리 집 댕댕이는 식사와 설거지를 동시에 한다. 참 합리적인 생활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