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좋아할 거라 산 선물을 남편이 뭔지 못 알아본다. 민망함이 하늘을 찌른다. 남편은 그냥 얇은 노트를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받았을 뿐이다. 흑.
바로 이 노트다. BTS 뷔라니까. 자기 진짜 몰라?!?!?!?!
불안하다. 이유는?
불안하다. 이번 생일에도 그런 일 일어날까 봐.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이번 생일에도 그런 일 일어날까 봐. 남편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살고 있을까 봐.
또 남편 생일이다.
작년에 그런 뜨악한 일을 겪고 나니, 선물 고르는 나의 안목에 당연히 의심이 간다. 이 세상에서 남편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자부했는데, 그놈의 노트에 왜 꽂혔는지. 자신감 바닥이다. 그래도 매년 새로운 기회가 있다니 그건 다행한 일이다.
'남편 생일선물'로 검색하니 지갑, 벨트, 운동화, 시계가 쭈르르 뜬다. 좀 더 현실적이고 적어도 망할 일 없는 선물은 단연코 '현금'이다. 주식이나 금을 사서 안겨준 얘기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남들은 그런 실속 있는 생일 선물을 해주는 마당에, 나는 남편도 모르는 빨간 하트 그려진 얇은 노트를 선물이라고내밀다니... 지나고 보니 더욱 할 말이 없다!
"남자는 물질에, 여자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여자들은 이벤트 자체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그 날에 특별한 의미를 둔다. 여자는 '의미'를 되새기며 함께 있어주기를 원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여기에 선물이 추가되면 조금 더 행복할 뿐. 한편, 남자들은 누구에게 받았나 보다 '무엇을 얼마나' 받았는지를 중요시한다. 그런 이유로 남자들에게 가장 쓸모없는 선물은 정성이 듬뿍 담긴 종이학 천 마리와 직접 뜬 목도리 되시겠다." -제리안 <나도 로맨스>
종이학 천마리와 직접 뜬 목도리는 아니지만, 그런 노트를 선물이라고 내민 나도 만만찮다. 내가 정신이 나간 거야. 그렇다고 이번 생일에, 세종대왕과 신사임당을 그릇마다 앉혀서 현금 생일상을 차려주거나, 묵직한 순금 10돈 목걸이를 남편 목에 걸어주면? 남편은 내가 노트 내민 것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생일은 코앞에 다가오고 고민은 깊어진다.
이럴 땐 딸내미에게 SOS를 치고 묻어가기 작전을 편다. 선물 두 개를 선택하고 결정, 결제까지 순식간이다. 엄마가 자기에게 보낼 금액까지 깔끔하게반반 계산을 끝낸다. 이런 걸 '세대차이'라 하나보다.
생일까지 보안이 필수다. 철통 같은 방어로 남편이 택배를 받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택배 온다는 시간에 딸내미와 난 외출도 삼가고 귀를 쫑긋거리고 앉아있다.
문제는 남편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택배가 있다는 거다. 두 달 전인가 중국에 주문한 라이딩 바지를 아직도 못 받았다고, 택배오면 총알같이 방에서 튀어나와 이렇게 묻는다.
"내 바진가?"
"아니야. 중국에 비 많이 와서 댐 무너지기 일보직전인데, 뭔 정신이 있다고 바지를 챙겨 보냈겠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갖다 붙이며, 남편 관심을 택배에서 멀어지게 노력한다.
첫 번째 선물은 이미 받아서 화장실 서랍장에 감춰두었다. 두 번째 선물은 딸내미가 아빠와 자전거 라이딩 다녀오면서 문 앞에서 발견했다. 딸내미가 다급하게 소리친다.
"어엉. 아빠. 그거 내 꺼야. 내 꺼."
"내 바지 아니고?" "아이참, 아빠! 바지는 잊어버리래도! 물에 떠내려 갔다니까."
"..."
딸내미도 아빠의 기억에서 '택배'라는 단어를 지우려 애쓴다. 참~~ 깜짝 선물 준비하기가 이리 힘들다.
드디어 생일날, 남편의 입이 귀에 걸렸다.
"생각지도 못했지? 꿈에도 몰랐지? 그지?"
좋아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나도 기분이 좋아 묻고 또 묻는다. "생각도 못했지~ 이런 걸 준비할 줄은."
야심차게 준비한 올해 생일 선물!
선물 뜯어보자마자 남편은 브랜드까지 이미 꿰고 있다.
1. 자전거 라이딩용 필수 아이템 카멜백 물통
"오호 맘에 든다. 그렇지 않아도 얼음도 안 들어가고 자꾸 녹아서 물통 하나 장만하려고 했는데... "
2. 자전거 라이딩용 휴대용 52 블루투스 스피커
"오호 이거 유명한 건데. 내가 집에 있는 무거운 스피커 싣고 다니느라 좀 힘들긴 했지."
음악과 자전거를 좋아하는 남편에겐 최고의 선물이다. 가끔씩 라이딩을 함께 하는 딸내미는 아빠에게 필요한 걸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선물 받자마자 자전거 앞에서 블루투스 설치한다고 꼼지락꼼지락, 역시 남자들은가지고 놀 재미난 장난감을 사줘야 한다니까. 내일 라이딩에 가지고 간다고 물통도 세척해서 말려놓는다.
다음날 남편은 카멜백 물통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블루투스 음악을 챙겨 왕복 3시간 라이딩을 떠났다. 배웅하는 내가 더 뿌듯하다.
30번 생일선물을 주고받고, 서로 방귀대장 뿡뿡이라고 놀려 먹을 만큼 함께 오래 살았다. 그런데 이제야 남편이 좋아하는 선물이 무언지 조금 알 것 같다. 경험 없이 깨닫는 지혜는 많지 않은가 보다. 세상에 쉽게 배우는 건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