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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공여사 Oct 31. 2019

물고문이 시작되었다

[불안의 진짜 이유] 그래야 내가 덜 불안하니까

“남편, 물 먹어.”

“남편, 물 먹었어?”

“남편, 여기 물.”

“남편, 2리터 물먹는 앱 깔았어?”

“남편, 2리터 물통 살까?”
 

하루 종일 물 얘기밖에 안 한다. 

남편만 보면 물을 충분히 먹었는지 닦달한다. 하루 종일 물 타령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왜 물에 꽂혀 남편에게 물고문을 하고 있는지, 왜 기를 쓰고 남편에게 물을 멕이려고 하는지. 

내 마음속 키워드는 ‘물’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불안하다.’

불안이 이번에도 안개처럼 조용히 와서 나를 질식시키려 한다. ‘그분이 오셨다.’를 항상 뒤늦게 안다. 왜 왔는지 이유도 자꾸 물어봐야 내 마음은 겨우 입을 뗀다.


불안하다남편이 더 많이 아플까 봐.’

말해봐. 네가 불안한 진짜 이유를.

세 번째 문장을 덧붙이는 일은 붙은 입 억지로 뜯어내는 것만큼 어렵다. 


불안하다남편이 더 많이 아플까 봐. 그래서 내가 감당하지 못할 힘든 일이 생길까 봐.’

진짜 이유까지 뱉고 나면, 감정 밑바닥이 다 드러나 쓰리고 아프다. 그렇게 깊숙한 곳까지 불안이 들어갔다는 게 무서워 목 놓아 울고 싶어진다. 불안의 진짜 이유를 말하는 것은 매번 나를 힘들게 한다.


물 먹어, 남편



누군가에게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는 ‘잔소리’는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즐겁지 않은데 그래도 계속한다. 불안하니까 자꾸 말한다. ‘이렇게 하면 더 잘될 텐데, 더 좋을 텐데.’ 상대가 잘되는 기준을 내 마음대로 정하고, 그 생각을 말하고 또 말한다. 


상대방이 그렇게 할 거라는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눈에 빤히 보여도 멈추지 않는다. 띄엄띄엄 말하고, 잊을 만하면 또 말한다. 내가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상황이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속 말한다. 


‘너 잘 되라고, 당신 잘 되라고.’하는 잔소리에는 상대에 대한 진심 어린 걱정뿐 아니라 ‘그러다 내가 겪게 될’ 결과에 대한 불안도 깔려있다. 술 담배 너무 하고 운동 안 해서 건강 해칠까 봐, (그러다 내가 너 뒤치다꺼리할까 봐.) 공부 안 하고 펑펑 놀다가 찌질한 대학 가서 지 밥벌이도 못할까 봐. (그러다 내가 너 먹여 살려야 할까 봐.) 나중에 너 때문에 내가 힘든 일을 겪을까 봐, 미리 무서워지는 게 불안이다. 잔소리가 멈추지 않는 이유다

     

불안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나 대상을 미리 상상해서 겪는 내적인 위협이다. 눈앞에 닥친 실체가 분명한 위협은 ‘불안’이라 하지 않고 ‘공포’라 부르고, 설레고 기다려지는 미래의 상상은 ‘불안’이라 하지 않고 ‘기대’라 부른다. 


내가 알 수 없는 미지의 경우의 수를 내가 통제할 수 없을 때, 불안을 느낀다. 한마디로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불안하다. 오늘 볼 면접에 무슨 질문이 나올지 모르니까 불안하고,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까 불안하다. 이직을 하면 지금보다 더 좋을지 나쁠지 모르니까 불안하다. 


남편에게 물고문을 시작한 나의 불안은 어느 날 갑자기 ‘건강에 좋으니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라는 건강 상식에서 출발한 게 아니다. 과거에 내가 힘들게 겪었던 일을 ‘기억하는 자아’가 지난 과거를 되씹으면서, 불안을 충분히 납득할만한 생각으로 만들어버려서다.


남편은 응급실을 세 번이나 스스로 걸어서 들어갔다. 처음에는 오밤중에 심지어 차를 운전해서 대학병원 주차장에 주차까지 하고, 혼자서 걸어 응급실에 들어갔다. 


“난 괜찮으니까 검사 몇 개 해 보고 집에 가면 돼. 그러니까 좀 자고 있어. 몇 시간 걸릴 거야.” 


나의 불안을 고스란히 읽어내는 남편이 나를 안심시키는 문자를 여러 번 보냈지만, 그날 밤 남편은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남편은 아침에 심장에 스텐트를 두 개나 박아 넣는 긴급 수술을 했다. 나는 새벽에 자고 있던 초등학생 딸내미를 깨워,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향했다. 그 날 새벽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보호자의 마음은 참 힘들다


초등학생 딸내미는 병원 대기실 의자에서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그림을 그렸고, 난 수술실 앞에서 울었다. 어제 멀쩡했던 남편이 응급실에 가고, 심장 수술을 받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수술이 잘 못 되면 어쩌나 불안하고 초조해서 눈물을 질질 짜며 울었다. 뒤늦게 달려온 친구가 내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감싸 안아줄 때까지.


두 번째 응급실은 3일을 입원하고 온갖 검사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났고, 어제가 세 번째로 응급실을 걸어 들어 간 날이다.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콩나물을 꺼내 들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웃옷을 걸치며 말했다.


 “미안한데, 나 아무래도 응급실 가봐야겠어.”


끓고 있던 미역국의 가스 불을 끄고, 옷을 갈아입으러 옷장 문을 여는데, 마음이 먹먹해지더니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불안이 내 온몸을 이미 점령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혈압은 170을 넘었지만, MRI, CT, 피검사를 1시간 만에 마치고 다행히 퇴원 수속을 밟았다. 검사 결과를 말해주러 온 의사가 말했다. 


“날 추워지니 밖에 나갈 때 따뜻하게 입고 나가시고, 물은 많이 먹고 있나요?”

“네…. 그게 요즘 좀 덜 먹는….”

“물 많이 드셔야 해요. 적어도 하루에 1리터는 드신다 생각하시고.”


의사의 얘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듣고 있던 나의 귀에 ‘물’이라는 단어가 꽂혔다. 

원인이 무엇이던 드디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물을 많이 멕여야 한다. 물을…. 그러면 응급실 가는 일도, 내가 그렇게 불안해 심장 뛸 일도 더 이상 없을지도 몰라. 


물을 먹이면 될 거라는 원인 하나를 통제하면서 내가 내 불안을 잠재우려 한다는 걸 나도 안다. 그래도 나는 내 할 일을 한다그래야 덜 불안하니까. 병원에 다녀온 그날 밤부터 남편에게 물고문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어젯밤 자다가 화장실을 여러 번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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