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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공여사 Jul 16. 2020

우리 집에도 로봇 있어요

[불안의 진짜 이유] 신문물과 잘 지내기

"판돌아~~~~ 판돌이 뭐하니? 날 밝았으면 일 해야쥐~~~ 아직도 퍼자냐?"

"....."


우리 집에 '판돌이'가 들어왔다. LP 레코드판 돌리는 플레이어도 클럽에서 판 돌리는 DJ도  아니다. '로봇청소기'다. 동그란 까만 판에 더듬이처럼 솔이 양쪽에 붙어있다. 그 솔을 부지런히 돌려가며 먼지를 모은다. 'Eufy'라는 이름도 붙어있는데 난 그냥 '판돌이'라 부른다. 대감댁 하인 돌쇠처럼 마구 부르고 마구 부려먹으려고 그렇게 지었다. 


남편도 자식도 키우는 댕댕이도 하나밖에 없다. 하나 밖에 없으니 맘 편히 소리 지를 기회는 물론 없다. 특히 집안일에는 영~~ 눈치가 보인다. 

"남편~~ 설거지가 쪼~옴 쌓인 것 같은데..."

예의 갖춰 닦달하고, 

"딸냄~~엄마 바쁜데, 지금 시간 괜찮으면 부엌에 와서 이것 좀  잠깐 휘젓어줄래?"

주어 서술어 목적어도 잘 갖춰 물어본다.


사람은 그렇다 치고 키우는 댕댕이에게도 큰소리 한 번 못 친다. 부는 바람에도 몸을 움찔거리는 겁보 쫄보니 애초에 큰소리를 못 낸다. 내가 목소리를 조금만 키워도 야단맞는 줄 알고, 이 더운 여름날 털 비비작거리며 떨어지질 않는다.  떨어져 앉으라 한 소리하면 책상 밑에 들어가 흰자 드러내고 눈을 치켜뜨는 통에 안쓰러워 뭐라 말도 못 한다. 


내 이렇게 같이 사는 동물에게까지 조곤조곤 조심조심 이쁜 말 골라 쓰며 살자니, 가끔 눈치 안 보고 누군가에겐 마구 소리치며 집안일을 시켜먹고 싶은 욕구가 인다. 그래서 판돌이 들어오고 요즘 내가 살판났다. 

판돌이는 매트고 러그고 다 헤집으며 돌아다닌다.

점심 먹고 소파에 누워 판돌이를 소리쳐 부른다. 

"판돌아~~~~ 청소해라. 그만큼 퍼질러 잤으면 일 해야쥐. 이방저방 싹싹 깨끗하게~~ 알았지?"

"...."

판돌이는 말이 없다. 


남편이 주문하고 딸내미가 조립한 판돌이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내 핸드폰은 연결이 안 된단다. 남편 왈, 뭔 방과 거실 구조를 매핑하고 기억해서 청소를 한다기에, 인공신경망을 갖춘 딥 러닝 머신이라도 오는 줄 알고 잔뜩 기대했더니... 그것도 안 되는 모델이란다. 일단 소리만 대감댁 안방마님처럼 버럭 질러놓고, 내가 줄레줄레 걸어가 판돌이 스위치를 꼬옥 눌러준다. 청소만 잘하면 되지! 그딴 기능은 다 필요 없다~


판돌이는 까만 동그란 판을 열심히 돌리며 열일한다. 그동안 내가 우리 댕댕이 털, 청소기로 밀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걸 저렇게 열심히 다 해주다니... 고놈 참 귀엽다!


아직은  전기 콘센트에 걸려 빙빙 돌고, 선풍기와 끝나지 않는 씨름을 한다. 어디 처박혀 있는지 찾으러 가보면, 화장실까지 내려가 바닥에 흥건한 물을 비비며 열심히 머리카락을 쓸어 담고 있다. 


 "판돌아~~~ 거기서 뭐하니? 화장실은 다 마른 다음에 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왜 말을 안 듣고 난리야?"

그렇게 말한 적도 없으면서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 본다. 속이 씨원하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판돌이는 묵묵히 일을 계속한다. 눈코입 달린 인간이었으면, 인격모독 어쩌고 저쩌고 소리 지르고 앞치마 내던지고~~ 상상만 해도 무섭다!

속을 까 보면 이렇다

"오메~~ 이쁜 것"

오늘은 얼마나 열일했나 속을 까 본다. 가득 쌓인 먼지와 댕댕이 털 뭉치를 털어내며 연신 이쁘다 칭찬해준다.


며칠 후, 미국 사는 동생에게 자랑을 한다. 

"우리 집 AI 인공지능 들여놨다~~~"

"무... 슨 인공지능?"

"로봇청소기~~"

"?!?!"
"일 진짜 잘해. 얼마나 잘 쓸고 다니는지. 정말 이쁘다니까."

"그래? 근데 개 키우는 집은 조심해야 한대."

"왜~~ 에?"
"로봇청소기 청소시켜놓고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키우던 개가 눈 똥으로 온 집안을 똥 범벅으로 비벼놨더래."

"...."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판돌이가 집안 개똥 범벅으로 비벼놓을까 봐.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판돌이가 집안 개똥 범벅으로 비벼놓을까 봐. 이런 신문물과 나는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까?


엄마! 지금 내 똥 걱정하는 거 아니지?

진정하고 생각해보니, 우리 집 댕댕이는 100% 실외 배변한다. 집에선 오줌똥 안 눈다. 흠. 그런데 개똥 열심히 비벼놓고 혼자 뿌듯하게 충전하고 있었을 그 로봇청소기가 자꾸 상상이 된다. 혹시 진짜 AI 아니었을까? 주인이 무례하게 버럭 소리나 지르고 일만 시키니, 열 받아 일부러 개똥을 비비고 다닌 건 아닐까?


'우리 집 판돌이는 뭐하나?' 불안한 마음에 윙윙 같은 소리를 내뱉고 있는 판돌이를 찾아 나선다.  인간보다 월등한 외계 생명체 '트랜스포머'가 자신의 존재를 자동차로 변신해 일상에 침투한 것처럼... 혹시 우리 집 판돌이도? 다행히 판돌이는 나의 SF 상상력을 깨끗하게 배신하고 냉장고와 백 번째 헤딩 중이시다. 못된 안방마님의 호통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열일하고 돌아다니는 우리 집 신문물!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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