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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공여사 Sep 18. 2020

비누 한 장의 행복

[불안의 진짜 이유] 이거 노인 냄새 때문은 아니겠지?

"향 좋은 비누 어디 없어?"

남편이 묻는다.
"글쎄..."

왠지 피부에 해는 안 끼칠 것 같은 생협 비누를 꺼내 준다. 

"이건... 아무 향도 안나잖아. 진하고 좋은 향으로 하나 사줘."

"으음... 노력해볼게."


쇼핑 젬뱅인 나에게 향비누를 찾아달라는 그런 어마무시한 임무를 맡기다니... 아무리 화면을 들여다봐도 향도  안 나는데, 향비누를 고르자니 뇌에 쥐가 난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마트 가서 진한 꽃향기 폴폴 날 것 같은 포장지 비누를 사서 급히 채워 놓는다. 

"이건 아닌데...."

남편은 딱 한 번 써보고 또 향 타령이다.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뭔 새삼 향 타령이야? 불안의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뭔 새삼 향 타령이야? 혹시 벌써 노인 냄새가?!?!?


"야아아아아~~~~~~~~"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본 것뿐인데 남편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럼? 왜 향비누를 찾는데?"
"자전거 타고 땀 너무 많이 흘려서 그래. 옷에도 몸에도 냄새 나서."

그럼, 그렇지! 우리가 아직 노인 냄새 걱정할 나이는 아니지. 불안을 거두고 다시 향비누를 찾아 헤맨다.


냄새: [명사] 코로 맡을 수 있는 온갖 기운

:[명사] 꽃, 향수 따위에서 나는 좋은 냄새

냄새를 귀신같이 잘 맡았다. 미국 유학시절, 26층 아파트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다국적 유학생들이 온갖 냄새를 풍기며 함께 살았다. 문제는 엘리베이터였다. 문이 열리면 후욱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후욱~~~~ 미치겠다. 인도 카레 냄새. 후욱~~~~ 백인들 치즈 냄새. 아마 그들은 더 미칠 지경이었을 게다. 후욱~~~~ 한국인 김치 냄새. 그 냄새들이 섞여 떠도는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참으며 24층까지 올라갔다, 냄새가 잔뜩 밴 빨간 카펫 위를 끝까지 걸어야 우리 집이 있었다. 


그러던 내 코가 언제부턴가 먹통이 됐다. 애를 낳으면 몸이 모두 뒤집어진다더니, 하필 코가 뒤집어졌던지 냄새를 잘 못 맡았다. 코로는 숨만 쉬었다. 어딘가 고장 난 게 분명하다. 이비인후과를 전전하며 코를 들추고 입 속도 보여주었다. 

"아무 이상 없는데..."

이상 없는 게 이상하다는 듯 의사는 말했다. 


냄새를 못 맡는 게 엄청난 '장애'는 아닌지라 그냥 살았다. 좋은 때도 있다. 남들이 누고 간  똥 냄새도, 우리 집 댕댕이 생식 만든다고 소간과 돼지 콩팥을 썰면서도 피비린내가 덜 났다. 


'냄새를 잘 못 맡는 것은 코가 아닌 뇌의 문제다. '냄새가 평소 같지 않다'는 느낌은 몸에서 당신에게 무언가를 알리려고 보내는 신호다. 당신 신체 계기판의 온도계에 '빨간불'이 들어오기 전에 내부 상태가 어떤지 점검하라는 신호 말이다.' -톰 오브라이언 <당신은 뇌를 고칠 수 있다>


코가 아니라 '뇌' 문제라니 뇌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을 굳게 믿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그래서 그런지 일 안 하고 띵가띵가 놀아서 그런지 냄새가 났다. 이전처럼. 그래도 좋은 향비누 고를 만큼 회복은 안됐는데, 좋은 향비누를 고르라니. 

이거다! 네스티단테 사이프러스 비누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밀밭>  오른쪽 시커먼 큰 나무가 사이프러스다.


황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고, 어쩌다 찾았다! 남편이 원하는 향비누. 


'그녀의 땀은 바다 바람처럼 상쾌했고, 머리카락의 기름기는 호두 기름 같았으며, 국부는 수련 꽃다발의 향기를 그리고 피부는 살구꽃 향기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성분들이 결합되어 향수처럼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뭐, 그 정도 향은 아니더라도 사이프러스 나무 향이 난다는 이태리 수제 천연비누다. 파라벤, 계면활성제 뭐, 그런 나쁜 성분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착한 비누. 이쁜 포장지를 벗기니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숲의 향이 화아아악~ 달려든다. 크기도 맘에 든다. 빨랫비누만 하다. 짓무르지 않고 단단하기까지 하다. 방향제가 따로 필요 없다. 내 맘에도 남편 맘에도 쏙 든다.


톡 잘라 1/2은 남편 화장실에 1/4은 내 화장실에, 1/4은 딸내미 기숙사 화장실에 자리를 잡았다.

1/4 조각 향비누


"아구구구 이뻐~~"

쓰다듬고 비비고 문대고 그러다 맡은 우리 집 댕댕이 정수리 냄새.

"크. 이 꼬리꼬리 한 냄새!  까뭉이 목욕 언제 했지? "

"얼마 안 됐는데... 두 달 조금 넘었어!"

"..."

딸내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분기에 한 번, 일 년에 4번만 까뭉인 목욕을 한다. 목욕을 자주 시키려는 건 인간의 편의지, 까뭉이에겐 하등 도움 안된다는 나름 과학적 이론에 기반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한 달은 이 정수리 냄새를 맡고 살아야 하는데...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사이프러스 향으로 까뭉이 정수리 냄새를 떨쳐낸다. 기분이 후. .  해진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손 자주 씻어라 귀에 못이 박혔다. 전 국민에게 통신비 제공보다 향 좋은 비누를 무료로 배포하는 건 어떨까? 사이프러스 나무 잎과 열매는 피부뿐 아니라 머리도 맑게 하고, 심리 치유 효과까지 있다 하니 딱이다. 향비누로 손 씻으며 바이러스 죽이고, 향 맡으며 집콕으로 생긴 우울증도 가라앉히고. 


우리 까뭉이 정수리도 이참에 향비누로 함 감겨볼까나? 


비누 한 장 사고, 행복이 길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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