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2025.04.26 율이 생후 327일의 기록

by 곰곰

정말 모처럼 마음내서 카레를 만든 날, 국자로 휘젓는데 무언가 걸렸다. 자세히 보니 카레용 돼지고기 포장팩 밑에 깔려있던 패드였다. 순간 너무 황당했다. 황당하고 또 황당했다.

"서방!! 망했어..!!"

제대로 망했다. 사실 이유식 거리를 함께 만들면서 요리를 했고 요리를 하기 전엔 쌓인 설거지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설거지를 하면서는 따로 장을 보러 마트에 가지 않도록, 설거지가 끝나면 바로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제발 카레 재료가 냉장고에 있길 바랐었다.

냉장고를 열었을 땐 남편이 낮에 봐온 재료가 있었고 "오! 바로 시작하면 되겠다!" 하며 야채를 다듬기 시작했다. 내 계획은 이랬다. 이제 율이가 먹는 야채 크기는 카레에 넣는 야채 정도로 먹을 수 있었기에 다듬은 재료 일부를 이유식 용으로 빼놓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스레인지 양쪽을 한쪽은 카레, 한쪽은 야채 큐브 만들기를 하면 쉽게 되리라 생각했다. 야채를 다 썰었는데 카레 가루가 보이지 않았다.

"서방! 카레 가루는 안 사 왔어?" 하니 "아 맞다"하며 깜빡하고 안 사 왔다는 것. 고기랑 야채를 먼저 익히자 싶어서 냄비에 고기부터 부랴부랴 넣고 만들었더랬다.

찜기엔 애호박을 먼저 넣어서 쪘다. 푹 익히려고 중간중간 뚜껑도 열어가며 어느 정도 투명해졌는지 확인했다. 애호박을 만들고 나서는 며칠 전 이유식용으로 사놨는데 손을 못 대고 있던 파프리카를 데치기로 했다. 파프리카를 빠르게 손질해서는 새로운 냄비를 꺼내서 물을 끓이고 데쳤다. 파프리카를 다지기 위해 다지기도 꺼내두었다. 파프리카를 식히는 동안 애호박을 쪘던 찜기 상태를 확인했는데 갈색으로 누른 자국이 보였다. 이대로 당근을 찌다가 탄 냄새가 날 것 같아서 파프리카를 데친 물에 그대로 당근을 삶기로 했다. 냄비를 닦기엔 손이 너무 많이 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신없이 이유식 큐브를 만들고 보니, 밥이 없는 걸 확인해서 아주 빠르게 쌀을 씻고 취사선택 버튼을 눌렀다.

"와, 진짜 힘들다..." 하며 한숨 돌리고는 물에 풀어놓은 고형카레를 다시 한번 잘 섞어준 뒤 잘 익은 야채 위에 부었다. 카레 물 농도도 다시 맞춘 뒤 보글보글 끓였다. 아주 보글보글 말이다.

이제 잘 익었겠지, 이제 곧 먹는다! 하는 기대감으로 국자로 휙 젓는 순간, 걸린 것이다. 그 패드. 그 패드가. 고기 신선도를 위해 깔아놓은 그 패드가 국자 끝에 걸렸다.

나는 상당히 지쳤다. 번아웃. 일시적 번아웃을 고백합니다.

사실 엊그제부터 내 컨디션이 좋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알레르기 비염으로 하루에도 재채기가 몇 번씩 나왔고, 대뜸 목이 갈라지듯이 아팠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오늘 낮 부랴부랴 이비인후과에 다녀왔다. 네이버로 검색하니 1시 45분까지 진료를 한다고 했고, 나름 서둘러서 갔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그렇게 다시 검색해서 더 늦게까지 진료를 보는 병원에 다녀왔다.

여기에 하나 더는 생리를 약 일주일 앞두고 감정기복이 매우 심한 상태였다. 스스로 너무 날이 서있다고 느껴졌던 터였고, 날이 선 마음이 입에서 날 선 단어로 바뀌어 그대로 상대방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집은 내가 지나간 자리에 군데군데 냉랭한 공기가 얼음조각처럼 박혀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엄청나게 애를 쓰며 만들었던 이 카레를 그대로 모조리 다 버려야 했을 때, 나는 터지고 말았다. 이것은 클라이맥스. 머릿속에서 다 떨어진 벚꽃 잎이 소용돌이 속에서 화려하게 흩날리듯, 감정이 폭죽처럼 팡하고 터져버렸다.

율이의 마지막 수유는 저 멀리 뒤끝으로 밀려난 후 가까스로 율이를 재우는 중, 방안의 어둠 속에서 클라이맥스 뒤에 찾아온 아주 큰 정적을 제대로 느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크게 내쉬었다. 아까의 감정은 어떠한 여진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주 거세게 요동쳤던 파도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냥 고요했다.

그러고 보니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는 것이 새삼 생각이 났다. 어제부터 화, 그리고 예민함. 이 두 가지를 힘껏 미간까지 꽁꽁 모아 지냈다.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다. 붙들면서 힘들었고, 내 눈치를 보느라 남편도 마음에 부침이 있었을 것이다.

카레를 몽땅 버린 것은 겨우 짜낸 에너지로 만든 만큼, 나의 노력과 정성이 허무하게도 그대로 사라진 것 같아서 너무 속상했지만 '조금만 천천히, 쉬어가라는 휴식'의 신호였던 것 같다.

에피소드라면 에피소드였지만, 단 하나의 웃음도 나오지 않았던 에피소드.

일단 쉬자.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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