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면 충분하다

2025.10.13 율이 생후 497일의 기록

by 곰곰

그토록 기다렸던 9월 25일이 2주나 지났다. 9월 25일은 처음으로 사본 연금복권 당첨 일이었다. 똥을 주무르는 꿈을 꾼 날 아침,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복권을 사야겠단 생각에 율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서둘러 복권을 사러 갔다.


당첨 발표 일을 기다리며 수십 가지 즐거운 상상을 했더랬다. 똥까지 주물렀는데 이거 정말 기대해도 되는 거 아니냐며 혼자 그저 즐거웠다.


“내가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당장 말 안 할 테니까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서운해하지 마”


남편에게도 복권 당첨이 사실화된 것처럼 안 하던 말도 해 놨다.


북적이게 손님을 초대해도 넉넉한 거실 크기, 둘째가 생겨도 이사 걱정 없는 방의 개수, 이 짐 저 짐 실어도 트렁크가 여유로운 큰 차, 어떤 나라도 얽매이지 않고 떠날 수 있는 여유.


9월 25일, 큐알코드로 당첨 여부를 확인한 후 부풀었던 꿈은 한순간에 톡 터져버렸다. 마치 비눗방울처럼 말이다.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지만 쥘 수 없는.


사라진 꿈의 비눗방울 자리엔 현실이 그대로 있었다. 소파를 두기엔 작은 거실, 공간 활용이 애매한 방의 구조, 언니에게 물려받은 연식 높은 차, 카드 값에 답답함이 밀려오는 현실.


그럼에도 내가 살아낸 하루하루엔 웃음이 참 많았다. 율이가 잠이 든 후 집안을 정리할 때 뜻밖의 공간에서 율이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도 웃음의 요소였다. 이를테면 서랍 안, 조그마한 옷들의 틈바구니에서 장난감이 나온다던지.


거실에서 놀고 있는 율이를 바라보는데 ‘귀’가 참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들리기만 하면 되는데 귀도 잘 생기고 눈도 2개, 귀도 2개, 손가락, 발가락 5개! 순간 이토록 건강히 잘 커주는데 더 바라면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애 첫 연금복권 구매는 에피소드가 되었고 며칠 후 친정에 다녀오게 됐다. 남편과 율이, 친정 아빠와 함께 놀이터에 가서 놀다가 자리를 이동하게 됐다. 평소 가보지 않았던 공간으로 율이가 발걸음을 옮기는데 뒤따라가는 친정 아빠의 어깨와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도 우리 삼 남매를 키우며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려고 얼마나 애를 쓰셨을까......’

아빠의 등짝이 커 보인 순간이었다.


율이를 키우며 하나의 측면으로 봤던 사안들에 대해 그 뒤로, 그 위로, 또 옆으로도 수많은 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게 된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뜻밖의 생각들을 하게 된다. 불현듯 눈에 들어왔던 아빠의 등짝처럼 말이다.


“복권 샀었어?”


남편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 구겨진 복권 종이를 보고 알았다는 남편. 아차차... 버리는 걸 깜빡했다.


정신없이 살아가는 게 분명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나’로 성큼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율이를 만나 이토록 웃음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도!


이만하면 이미 복권에 당첨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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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덕분에 안다. 무한한 나의 부모님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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