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장 멋진 이바구

초량 이바구길과 모노레일, 망양로, 유치환 우체통

by 키키 리리


일평생 나를 괴롭힌 질문은 "나는 왜 나밖에 되지 못할까?"였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하루키나 톨스토이처럼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재능이 뛰어났다면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을 텐데.' 하는 건방진 생각. 손을 뻗으면 왠지 닿을 수 있을 것 같은(물론 엄청난 착각임) 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최민석 작가의 『꽈배기의 멋』과 『베를린 일기』를 단숨에 읽으면서 쉬지 않고 낄낄거렸다. 브런치 작가인 몬스테라 님의 글도 마찬가지다. 자조와 해학이 넘치면서 한국의 온갖 조르바를 위해 일하는 그의 인류애 가득한 직업정신은 매 글을 읽을 때마다 감탄을 불러온다. 그렇다. 나는 유머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는 사람도 좋아한다.


나는 어떤가?


그런 유머 가득한 글을 쓸 수 있나?


단순히 웃긴 글이 아니다. 어떻게든 굴러가든 인생에 대한 경외, 가능성과 한계를 모두 가진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


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갑자기 우울해진다. 유머라고 지껄인 말은 다큐멘터리 해설 같고, 인간관계의 윤활유라는 유머는 내가 입만 열면 마찰을 일으킨다. 다른 이는커녕 나에 대한 애정도 자주 사라진다. 나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민다.


4월 12일도 그런 날이었다. 다른 사람을 자꾸 부러워하다가 자아가 쪼그라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자주 가던 갈맷길 대신 새로운 풍경 속에서 걸으면 좀 낫겠지, 싶었다. 길을 헤매고 돌아다니는 동안 나에 대한 생각을 접을 수 있다.


부산역을 지나갈 때마다 궁금했던 이바구길이 먼저 떠올랐다. 같은 학교 동료 선생님이 부산에 관한 수업을 할 때 어깨너머로 들었던 길이었다.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라는 뜻의 ‘이바구’, 그리고 부산 근현대 역사의 씨앗이 동구 곳곳에서 이야기꽃으로 피어난 ‘이바구길.’
부산 최초의 근대식 물류창고였던 ‘남선창고’부터 층계마다 피란민들의 설움이 밴 ‘168계단’, 영화 한 편으로 울고 웃게 했던 ‘범일동 극장 트리오’, 가냘픈 어깨로 부산의 경제를 지탱했던 신발공장 여공들의 발길이 오가던 ‘누나의 길’까지 이바구길은 근현대 부산의 옛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자, 역동적인 세월을 깊이 받아들인 동구의 상징적인 자취입니다.
- http://www.2bagu.co.kr/ 에서 인용


초량 이바구길로 가는 대중교통 편만 알아보고 집을 나섰다.




내게로 와서 길잡이가 되다



168 계단으로 가기 위해 여기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이바구길 안내판이 보인다.


하늘이 잔뜩 흐렸다가 비를 살짝 뿌렸다가 맑아졌다가를 반복했다. 버스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서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후덥지근한 날씨가 6월의 더위 같았다. 정오가 되기 전에 얼른 168계단에 도착해야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오로지 직감에 의지해 걸었다.


구) 백제병원 건물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헤맬 때 이바구길 사진관 옆에 세워둔 작은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처럼 헤매는 사람이 많았던 탓일까? 때를 맞춰 알맞게 내리는 단비처럼 안내판이 답답함을 풀어주었다. 안내판에는 지금 헤매고 있는 구) 백제병원과 이바구길사진관, 168계단에 가기 위해 거쳐야 할 초량교회와 초량초등학교, 모노레일, 전망대, 망양로까지 나왔다. 핸드폰에서 지도 앱을 켜서 보면 금방 해결되지만 희한하게도 낯선 여행지에 오면 사진을 찍을 때 외에는 핸드폰을 꺼내지 않는다. 사람이 워낙 구식인 탓도 있고, 지도 앱만 보며 걸을 때에는 보이지 않은 많은 것들이 그냥 걸을 때는 잘 보였다.


또다시 갈림길에 섰을 때, 소림약국 위 안내판을 보고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었다(소림약국 간판을 보자마자 말장난이 하고 싶었는데 '음, 약사가 소림사 출신인가?' 이런 몹쓸 생각을 하다가 '역시 난 글렀군' 하고 혀를 찼다).


초량교회를 지나 계속 위로 향했다. 곧 많은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168계단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춤했다. 계단 중간 턱과 왼쪽 벽에 붙은 작은 안내판이 '네 짐작이 틀렸어. 좀 더 걸어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168계단과 모노레일에 도착할 때까지 만난 안내판, 드디어 나타난 168계단(우)


곳곳에 붙은 안내판이 길잡이 역할을 했다. 첫 번째 안내판을 보고 걷다가 두 번째 안내판을 만나면 '아, 나는 제대로 된 방향으로 걷고 있구나'하며 안심했고, 몇 미터 남았는지 알려주는 안내판을 보면 힘이 났다.


내가 지도 없이 헤매는 이유가 '눈앞에 무엇이 나타날까?' 하는 호기심과 지금 걷는 길이 틀릴 수도, 맞을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 눈 뜨고 놓친 무언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좋아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오전 내내 걷고 나니 새로운 이유가 떠올랐다.


내게도 길잡이가 필요했구나-


한평생 다른 이의 얼굴을 갖고 싶어서 내가 가진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외면했다. 글만이 아니었다. 내가 가진 외모, 성격, 말투, 재능 없음. 그 모든 것이 마음이 들지 않아 누군가의 얼굴을 닮아가려고 애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허탈했다.


오늘처럼 안내판을 보며 걷고 헤매기도 했지만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른 자신을 돌아보니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가끔은 자신에게 실망하며 살지만 그래도 제대로 걷고 있다고

안내판을 보며 인생이 곳곳에 숨겨둔 힌트를 잘 찾고 있다고

난 참 잘하고 있다고 말이다.


모노레일 전망대와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충만한 기쁨


이날 여행의 절정은 망양로, 바로 이 풍경


전망대에 잠시 머물렀다가 망양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왕복 2차선이 대부분이었고, 간간이 지나가는 버스 외에는 다니는 승용차가 적었다. 오른쪽으로는 멀리 부산항이 보였고 양 옆으로는 산자락에 위치한 주택과 층수가 낮은 맨션이 눈에 들어왔다. 오락가락하던 비는 그쳤다. 구름 사이로 해가 비쳤다.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팔다리를 씩씩하게 움직였다. 눌러쓴 모자도 슬쩍 벗었다. 양손을 번쩍 들어 하늘을 만졌다. 나무뿌리들이 구불구불 움직이며 나를 슬쩍 위로 올려주었다. "아"하고 인사하자 눈앞에 보이는 산이 "아" 하고 소리 냈다. 풀쩍 뛰면 이 풍경 속에 들어가 그대로 멈출 것 같았다. 튼튼한 다리로 땅을 밟고 손을 뻗어 활기차게 걸으니 이 또한 나임을, 변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내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진 약점과 한계가 사라졌다. 아니, 그것은 그대로 내 안에 존재했다. 그렇더라도 나는 괜찮았다.




꼭 누군가가 되야할까?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계속 걸었다.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담벼락에 붙은 안내판과 전봇대에 걸린 표지판을 보고 유치환 우체통까지 걷기로 했다. 이 역시 즉흥적인 결정이고 계획에 없던 일이다.


길은 길게 이어졌다. 저 멀리 '유치환 우체통'이라는 빨간 표지판이 보이자 더 이상 안내판을 보지 않았다. 길을 따라 걸으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발걸음은 확신에 찼다. 초량 이바구길 168계단을 향해 떠난 오늘 걷기 여행이 망양로를 걸어 유체환 우체통까지 이어졌다. 첫 번째 목적지에서 그 다음 목적지까지, 또 그 다음까지 순조롭게 이어졌다.


나는 유머가 부족하고 위트 넘치는 글을 쓸 수 없다. 또한 자신에 대한 미움과 애증으로 방황한다. 그러나 부지런히 걸을 수 있는 끈기와 의지를 가지고 있다. 약점과 한계만 가진 사람은 없다. 재능과 가능성 또한 그 사람의 몫이다. 이 모든 사실을 포용함으로써 삶이 더 풍성해지리라.

그리고 가장 멋진 이바구는 당연히 나의 몫임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몫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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