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에게 다정한 날

흰여울 문화마을

by 키키 리리

사소한 일에도 화가 치밀었다. 짜증이 날 때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산 중턱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나는 까마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걸으려고 발을 뗄 때마다 부정적인 생각을 지그시 밟느라 힘이 들어갔다. 자려고 누우면 오른쪽 발바닥과 종아리가 간지러워서 계속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약을 줄인 뒤로는 더 심해졌다.


지난 3주간의 변화는 내게 유의미한 말을 전했다. 아직 반환점을 돌면 안 된다고. 너무 성급하게 약을 줄인 게 분명했다. 새끼손톱만한 약 두 알 중에서 한 알을 덜어냈을 뿐이다. 예전처럼 하루 7Km 이상을 걷고 충분히 자고 글을 쓰며 삼시세끼 밥을 잘 챙겨 먹는데도 이런 변화가 나타났다면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약을 줄인 게 문제였다.


내가 너무 자만했나? 나는 묵에서 은어(銀魚)가 되었다가 다시 도루묵이 된 심정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약을 줄여서 기뻤는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야 하다니. 그간 내가 얼마나 노력했고 애를 썼는지는 싹 잊어버렸다. 그럼 그렇지, 뭐. 이런 짙은 패배감이 나를 아래로 잡아끌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 의사 선생님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다음 날 아침, 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날이 흐렸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누가 내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돌리는 듯한 어지럼증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부엌 찬장을 열고 약봉투를 확인했다.


아!


외마디 탄식이 터졌다. 어젯밤 약을 먹지 않았구나. 남은 알약 개수를 확인하니 여러 날 빼먹은 게 분명했다. 최근 나타난 증상들은 약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서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기뻤다.


기회가 남아 있다.


난 여전히 은어고, 도로 묵이 될 일은 아직까진 없다. 슬며시 웃고 시계를 확인했다. 이렇게 좋은 날에는 어디든 가야 한다. 어디를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흐린 날의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밝고 화창한 날이 아닌 흐리고 축축한 날의 바다.


내가 그런 날의 바다를 최근에 본 적이 있던가?




발은 바닥에


부산역에서 508번 버스를 타고 흰여울 문화마을에 내렸다. 처음 마주한 풍경은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과 하늘보다 더 짙은 회색 바다 그리고 조업 중인 작은 어선들이었다. 구름이 물을 잔뜩 끌어안고 있어서 언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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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해설사분이 곁에 계셔서 그에게 산책코스를 추천받은 뒤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길부터 걸었다. 가게와 주택 담벼락, 전망대에 시선을 끌만한 벽화가 많이 보였다. 신기하고 예뻤지만 내 눈엔 잘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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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보다는 바다를 보는 일이 더 좋았다. 어둡고 눅눅한 바다 냄새가 색달랐다. 상쾌하고 가벼운 날에는 절대 맡을 수 없는 냄새. 울산 바닷가에서 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숨을 깊이 들이켰다. 서늘한 바닷바람이 몸 안에 들어왔다가 따뜻해져서 나갔다.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마을에 자리 잡은 작은 주택과 가게들은 해안가 절벽에 자리 잡은 바다제비의 둥지처럼 작고 안온했다.


계속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해설사가 설명해준 느린 우체통까지 금세 도착했다. 열심히 걷느라 몸에서 열이 나는데 바람은 제법 서늘했다. 안은 뜨겁고 밖은 차갑고. 구들장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지친 나그네가 방문을 활짝 열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느끼듯 나 역시 이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즐겼다. 몸은 소나기를 뒤집어쓴 것처럼 땀으로 흠뻑 젖었다. 추웠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손수건을 꺼내 목에 감았다.


안녕, 비둘기야!


흰여울 전망대 근처에서 물을 마셨다. 초코바 2개 먹으면서 어슬렁거렸다. 그러다가 '발은 바닥에'라는 글자를 발견하곤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걸 쓴 사람은 관광객들이 의자에 앉아서 낮은 벽 위에 발을 올려놓는 장면을 무수히 많이 봤던 걸까? 그중 누군가는 다른 이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거드름을 피웠겠지. 또 누군가는 꽈당하고 넘어져 다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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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은 바닥에


그래, 발은 바닥에 닿아야지.


혹시 넘어져도 덜 다치고 금방 일어날 수 있으니까.




다정한 순간


유치환 우체통에서도, 감천 문화마을에서도 느린 우체통을 만났지만 흰여울 마을에서 만난 우체통은 좀 달랐다.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도착 날짜가 재미있다. 일 년 후와 내 마음대로. 깰 받은 우체통이니 느리게 일을 할 게 뻔한데 내 마음대로라는 선택지가 더 있다. 왠지 우체통이 마음을 가진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편지를 삼키면 무조건 며칠 안에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내 맘대로 할 거야.', '일하고 싶을 때 일 할 거야.' 하는 그의 외침.


너도 나도 일하기 싫고 마음대로 살고 싶은 건 똑같구나.


깰 받은 우체통


촉촉하게 젖은 우체통을 한 번 쓰다듬고 마을로 향하는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마을 중간을 가로지르는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작은 가게들과 마을 주민들의 집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가게와 집 앞에 내놓은 화분을 구경하며 걷는데 길고양이 밥자리를 보고는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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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사료가 젖을까 봐, 고양이가 비를 맞으며 밥을 먹을까 봐 저렇게 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우산을 펼치고, 노란 끈과 빨간 끈으로 매듭을 묶어 바닥에 고정시켰다. 한 때 딸기가 담겨 있었을 것이 분명한 빨간 다라이를 꺼내 물을 붓고 사료를 소복이 담은 사람.


그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맞은편에 쭈그리고 앉아 그 사람을 상상했다.


아마 무척 다정한 사람이겠지.


다정한 사람.


나는 다정한 사람을 무척 좋아하고 다정함을 표현하는 이도 좋아한다. 나이를 조금 더 먹으면서 세상을 너무 팍팍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타인에게 웃어줄 기회가 생기면 미소를 보내고 눈인사를 주고받는다. 식당에서, 가게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만나는 타인에게 자주 미소를 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무척 좋은 일임을 나는 안다.


얼마 전 순두부집에서 혼자 밥을 먹다가 누군가 내 식사에 끼어들었다. 갑작스럽게 합석을 하게 되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지만 결국 먼저 자리를 뜨면서 상대방에게 "맛있게 식사하세요."라고 말했다. 입 안 가득 음식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하는 그를 보고는 그래도 먼저 인사하길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했다. 합석의 불편함보다는 내가 그에게 보낸 짧은 인사가 마음에 남아 식당을 나서면서 마음이 가벼웠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우산 주인에게 고양이를 위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다정한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좋지만 다정함이 묻어나는 장소를 바라보는 일도 무척 좋았다.




나의 숨비소리는


이제 해안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다 가까이서 걸으니 눅눅한 바다 냄새가 오히려 산뜻하게 느껴졌다. 바닷바람에는 서늘함이 존재했다. 바람의 손길은 세찼지만 사납지 않았고 그저 내 머리카락을 날리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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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이 바람과 함께 하늘로 용솟음칠 것 같았다. 작은 집과 화단에 심은 예쁜 꽃, 골목 중간중간 보였던 고양이와 아름다운 가게 창문, 제각각 다른 이유로 여기에 도착한 사람들과 바다제비처럼 자신의 삶을 부지런히 지어가며 사는 주민들까지. 그 모든 것이 한 데 어우러져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하늘로 떠나는 장면을 상상했다.


바람의 서늘한 손길이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순간을 가만히 느꼈다.


아, 발은 땅에 닿아야겠구나.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해녀를 보았다.


휘이이-휘이이.


잠수를 끝내고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그가 내뱉은 숨비소리. 내 귀에는 휘파람 소리 같았지만 그에겐 참은 숨을 내뱉은 힘겨운 삶의 소리였다. 물 밖에서 그를 지켜보는 누군가를 향한 안도의 신호였다. 힘겨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소리를 치거나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짧고 경쾌한 휘파람 소리를 낸다. 나는 숨비소리를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이해하고 싶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숨비소리를 가지고 있겠지. 그게 휘파람 소리든, 경쾌한 노래든, 힘겨움에 내지르는 비명이든, 툴툴거리는 투정이든 상관없다. 타인의 숨비소리를 들으며 그가 무사히 삶의 영역으로 건너왔다고, 오늘도 열심히 살기 위해 애썼다고 말해주는 삶을 떠올렸다. 내가 떠올린 삶이 그저 상상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길을 재촉했다.


슬슬 배가 고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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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추장스러운 짐은 걸어놓읍시다^^ (좌), 흰여울 해안터널, 피아노 계단(우)


흰여울 해안 터널을 지나 피아노 계단을 걸어 올라가 해녀촌으로 향하는 길 앞에서 멈췄다. 자갈로 박아놓은 화살표 앞에서 어지럼증을 느꼈다. 도대체 어디가 어디란 말인가? 공부 계획에서 이탈한 수험생처럼 갈팡질팡했다. 배가 고팠지만 해녀촌에서 혼자 먹을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돌아온 길을 되짚어가긴 싫었다. 좁은 갈림길에서 멍하니 바다만 바라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도로가로 나가는 길을 택했다. 남포동에 가서 밥을 먹어야지.


어떤 메뉴를 고를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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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들고 있었다. 왠지 기분이 썩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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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를 잠시 잊고 점점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난 여전히 은어일까? 여전히 은어겠지? 아무렴 어때. 은어든 묵이든 도루묵이든 상관없다. 나는 오늘 열심히 걸었고, 그걸로 족했다. 충분했다.


나는 나에게 한껏 다정해져서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씩씩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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